글쓰기와 의사소통 한국의 대중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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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음악은 아무곳 에서나 들을 수 있는 생활 중 에 하나이면서 전 세계가 함께 공유 할 수 있는 것 중에 하나이다. 그럼에 대중음악이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들어와서 어떤 영향력을 미쳤는지 알아보도록 한다.
2.대중음악이란?
한국의 대중가요는 선교사들이 가지고온 찬송가중심의 서양음악이 수입되면서 번안되어 불리기 시작한 것으로, 이 시절 창가는 서양음악을 지칭하는 통례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1910년 학부에서 (보통교육창가집)을 발간하였는데, 거의가 1872년 일본에서 발간된 (소학창가집)의 곡들은 전재한 것들이었다.
3. 대중음악이 시대에 끼친 영향
3.1 개화기에서 광복 전까지의 한국의 대중음악
조선민요의 대표곡인 아리랑은 우리나라의 전통을 이어온 맥이자 근대 최초의 노래라 할 수 있다. 아리랑은 지방에 따라 그 선율이 다르지만 바탕이 되는 정서적인 측면에서는 같다. 지역별로 경기지역의 밀양아리랑, 전라지역의 진도아리랑, 강원지역의 정선아리랑, 황해지역의 해주아리랑, 평안지역의 긴아리랑과 자진아리랑이 있다. 이러한 아리라은 개화기시대의 전유물인 축음기 시대가 열리면서 새로운 창작곡 ‘아리랑’이 선보이기 시작했는데, 우리말로는 신민요, 일본식으로는 창가의 발현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때는 어느 한나라의 색깔이 정해진 것이 아닌 찬송가와 신민요, 창가, 노동요 등이 복합적으로 배합돼 하나의 새로운 음악장르의 노래가 태동된 것이었다. 대중매체가 대두되자 유행가수들의 등장이 이어졌다. 1910 빅터레코드사가 백춘재의 레코드를 발매한 뒤 한국시장에 본격적인 음반활동이 시작됐다. 1930년대는 이러한 복합성을 띈 음악장르가 아리랑과 함께 공유했다. 당시 신민요가수인 선우일선과 이난영은 ‘레코드 취입’을 통해 인기를 얻었다. 이때부터 ‘아리랑’은 많은 창가가수들에 의해 녹음되고 보급되었다. 신민요 아리랑은 1926년 나운규가 감독하고 주연한 영화 ‘아리랑’ 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민족의 긍지를 나타내는 노래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특히 채규엽은 ‘유랑인의 노래’ , ‘봄노래 부르자’ 등으로 최초의 유행가를 부른 가수로도 알려졌다. 1932년 이옥하는 ‘강원도 아리랑’ 으로 리갈레코드에서 앨범을 발표했고 다음해 석금성도 ‘아리랑강남’을 콜롬비아레 코드에서 장일타홍은 리갈레코드에서 ‘아리랑의 꿈’을 각각 발표했다. 이렇듯 아리랑은 신민요와 창가가 범람하는 때 새로운형식으로 음반발표가 이어졌다. 새로운 신민요가수로 등장한 가수는 황정자 이었다. ‘아리랑 쓰리랑’ ,개작곡 ‘아리스리낭낭’을 킹스타와 아세아레코드에서 취입한 그는 50년 럭키레코드에서 ‘약산진달래’를 발표, 인기를 한 몸에 얻었다. 신민요는 1960년대까지 황금심, 이미자, 최정자, 김세레나 등까지 이어졌다. 서양음악을 ‘창가’라고 부르게 된 것은 1872년 일본에서 유래한 소학교 교재로 ‘창가독본’ 이 보급된 게 시초였다. 이렇게 ‘창가’ 란 말이 점차 대중에게 알려지면서 나중에는 ‘찬미가’ 나 학교 교재용 음악, 또는 신식군가 등을 모두 합쳐서 ‘창가’로 통칭하게 되었다. 아펜젤러는 선교사였기 때문에 보급된 노래들이 대개 미국과 영국의 포크송이나 포스터의 민요가 주류였다. 1930년대 중반서부터는 전문적인 예능수업을 받은 예인들의 무대 참여도 두드러졌다. 1934년 박부용은 ‘노들강변’을 발표하며 화려한 무대로의 진출을 시작했으며 김인숙, 한정옥, 김운선, 김춘홍, 이화자, 이은파 등이 가수로 등장하여 인기를 모았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이미 서양의 문호를 개방했기 때문에 외국 문물에 대해 비교적 관대해 1910년 한일합방조약이 발효된 이후에도 초창기에는 아무런 규제가 없었다. 그로 인해 1930년대에는 재즈까지 들어 왔다. 아마 미국의 뮤지컬 영화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그래서 일제시대에 교육을 받은 어른들 중에서는 팝 음악을 지금도 재즈라고 부르는 습관이 남아 있다. 당시 우리에게 소개된 노래로 최초의 토키 영화 ‘재즈 싱어’의 주인공 알 졸슨의 이 있는데 이곡은 50년대 진 켈 리가 주연한 영화 ‘비는 사랑을 타고’의 주제가로 사용되면서 유행했다. 그런가 하면 스코틀랜드의 민요, 또 이탈리아의 민요 등 비교적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곡들이 이때부터 불러졌다. 그리고 간헐적이긴 하지만 러시아 음악도 흘러들어와 코작 춤과 함께 ‘카추샤가’ 크게 유행했다. 한편 일제 강점기가 되면서 창가란 말 대신에 등장한게 서양음악을 줄여서 부른 ‘양악’ 이었고 다시 경음악 또는 라이트 뮤직이라고 불렀는데, 일본인들이 클래식과 비교해 대중음악이 가볍다는 뜻에서 부르게 된 게 그대로 우리에게 전수돼 아직까지 경음악 또는 라이트 뮤직이라고 호칭하고 있다. 1931년 일본은 청일전쟁과 노일전쟁을 일으키면서 확전일로를 치닫다가 1941년 12월 8일에 미국에 선전 포고를 하면서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져 마침내 제 2차 세계대전이 터지게 되면서 창씨개명과 함께 외래어를 못 쓰게 했다. 특히 미국과 영국을 적성국가로 규정하면서 그동안 허용했던 영국과 미국의 노래를 전시 체제에 맞지 않는다고 무려 1100곡을 금지곡으로 묶었다. 반면 동맹국인 독일, 이탈리아의 음악은 물론 라틴 음악도 허용해 왈츠, 탱고, 룸바 등이 소개되었고 다미아의 ‘파리아의 축제’ 등이 그나마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널리 불러졌다. 1930~1945년대까지는 왜색음악의 전성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일제잔재가 뿌리내린 시대였다. 일각에서는 왜색 찬양 음악인들에 대해 당시의 정세나 민족적 억압시기, 정화 등을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도나오고 있긴 하다. 그러나 민족사안의 측면에서 한 국가의 문화적 정기를 책임질 창작인 들의 이 같은 매국적인 활동을 어떻게 포용하겠느냐는 문제도 강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1937년부터 해방 전까지 풀리돌, 콜롬비아, 태평 등일본 음반회사들이 발매한 친일음반 중에는 일본정책을 합리화하고 선전수단으로 이용된 대중음악은 모두 41곡, 작사가 12명, 작곡가13명, 가수24명에 달했다. 이 명단 중에는 대중음악계에 원로가수로 꼽히고 있는 김정구를 비롯한 고운봉, 남인수, 이난영,백년설,장세정, 이화자 등 쟁쟁한 스타들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작사가 중에는 최남선, 작곡가로는 손목인, 박시춘, 한상기, 김해송, 이재현, 전기현, 왕평 등이 있다. 대표적인 친일노래로는 내선일체를 합리화한 ‘낙화삼천’(김정구 노래/김해송 작곡/조명암 작사)과 조선지원병제도를 옹호한 ‘혈서지원’ (백년설,박향림,남인수 노래/박시춘 작곡/조명암 작사), ‘행복한 이별’ (고운봉 노래), ‘지원병의 어머니’ (장세정 노래), ‘아들의 혈서’ (백년설 노래) 등이 있다. 이러한 국내 창작인들의 노래와 곡들은 일본의 음악적 우월주의와 또한 식민정책의 일환으로 앞장 세워졌고 민족정기를 빼앗는 잔인한 문화적 침탈로 이어졌던 것이다. 최근에는 이러한 친일음악인의 과거에 대한 한국 대중음악사에 있어 큰 오류와 치욕의 상흔이지만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반성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여론이 제기되고 있다. 대중음악인들은 속히 대중음악에 뿌리내린 일제 잔재를 청산하고 국가경쟁력과 의용적인 창작열의를 고취, 고유의 민족문화 발전에 기여해야 할 것이다.
3.2 1960~1970년대
참고문헌
*참고문헌
선성원 지음,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대중가요, 현암사, 2008
임진모 지음, 우리대중음악의 큰 별들, 어진소리, 2004
사이먼 프리스,윌 스트로, 존 스트리트 엮음, 대중 음악의 이해, 한나래, 2005
인터넷 사이트
http://blog.naver.com/wonwoo_kim?Redirect=Log&logNo=100029660076
http://jisikworld.com/report/view.html?dno=345167&link=review
http://blog.naver.com/jinurock?Redirect=Log&logNo=1200894565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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