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경제사] 일제 강점기 경성의 공사장 일용노동자의 생활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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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 일제 강점기 공사장 일용노동자의 형성과 그 의미

Ⅱ. 조사방법
ⅰ) 자료수집
ⅱ) 조사 품목 선정
ⅲ) 식단 구성
ⅳ) 기초 자료 입력
ⅴ) 일일 식비, 소비자물가지수, 실질임금 계산

Ⅲ. 결과
ⅰ) 조사 품목 소매가격
ⅱ) 명목임금
ⅲ) 일일 식비
ⅳ) 소비자 물가지수
ⅴ) 실질임금

Ⅳ. 결론

본문내용
Ⅰ. 서론 : 일제 강점기 공사장 일용노동자의 형성과 그 의미

1910년 8월 22일 한일합병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한국은 그 후 35년간 1945년까지 일제 치하에 놓이게 된다. 일제는 조선 점령 이전부터 토지를 자유롭게 소유하고, 그것에 대한 법정 인정을 받음으로써 토지약탈을 엄밀히 준비하였다. 그러다가 조선에서 정치적 지배권을 확립하자 정책적으로 약탈 식민지성을 더욱 강화하였다. 1910년 9월에는 <토지조사법>과 <토지조사법시행세칙>을 제정하고, 토지조사사업을 강행하였다. 전석담, 최윤균 원저, 김인호 옮김, 『근대 조선 경제의 진로』(원제 : 조선근대사회경제사), 아세아 문화사, 2000, 139쪽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으로 인해 소작농민이 급격히 증가하였다. 동시에 식민지시기 이전에 비해 소작조건에 크게 악화됨으로써 농가수지가 계속 나빠지고 이 때문에 파산한 농민들은 계속 농촌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1920년대 중엽에는 대체로 연간 15만 명 정도의 농민들이 농촌을 떠났다. 이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농민이 고용인, 즉 품팔이꾼으로 나갔으며, 이들의 대부분은 이 시기의 조선총독부가 식민지 지배기구의 기초시설로 벌이고 있던 각종 토목공사장의 막일꾼이 되었다.
일제는 식민지 산업의 기초적 시설인 철도 ․ 항만 ․ 도로 ․ 수력발전시설 ․ 수리조합사업 등을 실시하여 농촌에서 분출되는 값싼 노동력을 대량으로 수용하였다. 그러나 농촌을 떠난 이들이 토목공사장의 노동자로 변신하는 일도 그다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식민지 조선에서 수력전기공사, 수리조합공사, 도로 ․ 항만공사 등의 토목공사는 일반적으로 조(組)라고 불리는 토목공사 청부업체에 맡겨졌고 이들이 필요한 만큼의 노동자들을 일용노동으로 모집하여 공사를 수행해나갔다. 농촌에서 분출되어 나오는 인구가 워낙 많았고, 중국인 막일꾼의 유입까지 겹쳐서 식민지 지배당국이 비교적 큰 규모의 공사를 벌여도 이들 노동자를 모두 수용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이 농민이 토목공사장에 취업하는데도 이른바 머릿돈이 필요한 경우가 생겼다.
이들 토목공사장 막일꾼은 사실상 식민지 전체 기간을 통한 노동자층의 대표적인 존재들이었으며, 이들은 또 항상 실업의 위협을 받고 있는 식민지 시기 빈민의 일부였다. 강만길, 『일제시대 식민생활사 연구』, 창작과 비평사, 1987, 289~294쪽
여기에서 우리는 앞으로 이들의 명목임금과 당시 물가수준을 조사하는 한편 하루 2000kcal의 식단을 구성하여 식비를 계산할 것이다. 이를 통해 일제 강점기 시대 경성지역의 공사장 막일꾼의 생활수준을 이해할 수 있다고 보여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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