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사의이해 임나일본부설이란 일본의주장과한국의반박 일본교과서비교분석 한국교과서분석

  • 등록일 / 수정일
  • 페이지 / 형식
  • 자료평가
  • 구매가격
  • 2021.02.16 / 2021.02.16
  • 15페이지 / fileicon pptx (파워포인트 2007이상)
  • 평가한 분이 없습니다. (구매금액의 3%지급)
  • 2,500원
다운로드장바구니
Naver Naver로그인 Kakao Kakao로그인
최대 20페이지까지 미리보기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자료평가하면 구매금액의 3%지급!
이전큰이미지 다음큰이미지
본문내용
교과서로 살펴보는
고대 한ㆍ일관계사
-임나국에 대해서
목차
임나일본부설 이란?
일본의 주장과 한국의 반박
일본교과서 비교 ㆍ 분석
한국교과서 분석
총론
참고문헌
1. 임나일본부설 이란?
동아일보 1998년6월20일자
2. 일본의 주장과 한국의 반박
일본의 주장
한국의 반박
『일본서기』
「광개토대왕비문」
『삼국사기』
『송서(宋書) 』
. 칠지도
『일본서기』 일본에서도 문제점 지적
「광개토대왕비문 」 왜가 고구려나 신라와 싸우는 내용
『삼국사기』 대부분 왜가 단순히 신라를 침입하는 내용만 기록
『송서』 왜의 한반도 남부에 대한 군사권의 자칭과 승인 뿐
전남 순천 운평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가야계 토기
. 칠지도는 백제가 하사한 것
2010년3월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가 임나일본부설 폐기
참고문헌
6. 참고문헌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김현구,2010
『임나 문제와 한일관계』한일관계사연구논집 편찬위원회, 2005
1
2
임나일본부설에 대해 들어보신 적 있으십니까? 임나일본부설은 근10~20년 전부터 대두된 한일간의 역사문제입니다. 임나일본부설이란 ‘야마토정권이 4세기 중반에서 6세기 중반까지 약 200년간 한반도 남부의 임나<가야>를 직접 지배했고, 백제와 신라를 간접 지배했으며 그 지배기구로서 설치한 것이 임나일본부였다’는 말에서 유래한 설입니다. 김현구씨가 쓰신 책『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에서는 1910년 한일강제병합을 전후한 시기에 사학자들을 동원하여 임나일본부설 다른 말로는 남부 경영론을 본격적으로 연구 시켜 일본이 일선동조론과 함께 35년간의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는 관념적 도구로 이용되었다.
즉 19세기 말에 들어서면서 근대 일본에서는 한국을 정벌해야 한다는 이른바 ‘정한론’이 대두되었고 여기서 주목할 만한 대목은 정한론이 일본에게 미지의 땅을 개척하는 침략이나 ‘진출’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정한론은 고토 회복, 즉 잃어버린 옛 땅을 되찾자는 논리로 뒷받침되었고 정한론자들에게 한반도는 일본의 잃어버린 땅이었으므로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입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십년도 넘게 전부터 뉴스와 신문에서도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관심이 높으며 그와 함께 역사교과서에 대한 관심도 상당히 더 높아졌습니다.
3
이러한 임나일본부설에 대해 양국의 팽팽한 입장은 몇 십년 동안 끊이지 않고 대두되는 쟁점이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일본서기와 광개토대왕비문, 삼국사기, 송서에 나온 내용을 중심으로 주장했는데 이에 대한 한국의 반박을 들어 비교해 보겠습니다. 일본에서 임나일본부설이 대두되기 시작한 것은 1949년, 쓰에마스가 임나흥망사를 저술하며 4c에서 6c 중반 한반도 남부에 임나일본부가 존재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임나는 가락,가라,가랑 등으로 불리는 가야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일본서기에서 ‘임나’라는 말이 많이 또 집중적으로 거론되었는데 이 책에서 ‘일본’이라는 말이 처음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보다 앞선 일본의 역사 기록인 고사기(古事記)에는 임나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또한 일본이라는 용어은 7c 중반 타이카 개신(645) 이후 국호로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3c에 임나일본부가 설치되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과 모순됩니다.
송서에 따르면 왜의 5왕이 421년부터 478년까지 중국에 조공한 내용이 서술되어 있고, 그 내용은 왜 5왕이 한반도 남부에 대한 모든 군사권은 청한 것으로 쓰여 있습니다. 더욱이 이 내용은 제 3국인 송나라의 사서이므로 신뢰성이 높다고 일본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또 삼국사기에는 기원전 50년에서 기원후 500년까지 왜의 침입 내용이 29건이나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근거로 일본은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삼국사기에는 대부분 왜가 단순히 신라를 침입하는 내용만 기록되어 있고, 송서의 내용도 왜의 한반도 남부에 대한 군사권의 자칭과 승인 뿐이므로 왜가 한반도 남부를 어떻게 지배했는가 하는 정확한 증거는 기록되어 있지 않고 있어서 일본의 주장에 신빙성이 없다는 의견입니다.
그리고 임나일본부와 관련된 제일 중요한 접점은 광개토대왕비의 해석에 관한 것입니다.
일본이 임나일본부의 근거로 삼는 구절 부분에 3글자가 지워져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4
이 비문 내용의 빈칸이 세 개가 있는데 이것 때문에 비문의 해석이 완전 달라집니다. 일본은 □□□ 부분에 임나신(任那新)을 넣어 해석합니다.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서(倭以辛卯年來渡海) / 격파했다(波) /
백제, 임나, 신라를(百殘任那新羅) / 그래서 신민으로 삼았다(以爲臣民)
우리나라에서는 □□□ 부분에 연침신(連侵新)을 넣어 해석합니다.
왜가 신묘년에 오니(倭以辛卯年來) / (광개토왕이) 바다를 건너가서 격파했다(渡海波) /
백제가 신라를 계속 침략하여(百殘連侵新羅) / 이를 신민으로 삼았다(以爲臣民)
하지만 이러한 여러가지 논리적인 반박에도 불구하고 일본 우익을 대표하는 후소사 교과서에는 광개토왕릉비와 비문을 소개한 뒤 ‘야마토 조정이 반도 남부의 임나라고 하는 지역에 거점을 구축한 것으로 보인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2010년 3월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가 한반도에 일본부가 들어서지 않았다는 의견에 뜻을 모으고 임나일본부설을 폐지했지만 아직도 일본은 한반도 남부 지배를 부정하지 않고 있어서 표면상의 폐지에 불과하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는 실정입니다.
일본의 학생들과 한국의 학생들은 임나일본부설에 대해 어떻게 배우고 있는지, 또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양국의 교과서를 보며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5
먼저, 「校書株式社」가 1982년에 출판한 교과서는 임나에 대한 언급이 없었고 상당히 객관적으로 서술하였다고 보았습니다. 百やからと手を結んで라는 구절에서 앞으로 분석한 다른교과서가 みまな 라고 지역을 쓴 것과 달리から라고 언급하여 당시 임나일본부설을 강하게 주장하였던 일본과의 시대상황에서 상대적으로 객관적으로 썼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교과서에 나온 문장을 보면 한국과의 교류가 있었을 것이며 서로 협력하였을 것이다라고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6
1982년에 출판된 「水書院」의 교과서를 보면 우선 앞의 교과서와 다르게 5세기 동아시아 지도를 보여주었습니다. 지도를 보여줌으로써 시각적인 효과를 주는데 이 지도에 우리나라 가야라고 하는 부분을 から라고 쓰고 바로 괄호로 みまな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암묵적으로 임나에 대한 자신들의 영토였을 수도 있다라는 시선을 표현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から地方に進出し,百と結んで라는 구절에서進出와からをほろぼし、朝鮮南部の日本の協力を退けた구절에서協力라는 단어에서 자신의 나라라고 강하게 주장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강하게 임나는 자신의 나라였다 라고 표현을 하고자 했다면 진출, 협력이라는 단어보다는 영토를 확장, 일본의 영토가 망했다는 식으로 더 세게 표현했을 것 같습니다.
7
「中出版株式社」의 1982년 출판된 교과서에 실린 지도를 보시면 から라는 단어는 보이지 않고 모두 みまな 라고만 표기되어 있습니다. 교과서 내용에서 모두 みまな라고 표기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から단어를 빼었다는 것 자체가 가야가 한국의 땅이 아니었고 일본의 땅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또한 지도와 함께宋書倭의 일부를 실어 자신들이 송에 임나는 자신의 땅임을 요청하는 문서를 함께 기재하면서 이것이 한반도에 대해서는 어떠한 영향력도 미치치 못했다는 부연 설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치 그것이 사실인양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료상의 기록을 그대로 쓴 것이기 때문에 문제로 지적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또 일본이 주장한 임나일본설의 근거로 사용한 광개토비에 쓴 글을 주석으로<별쳐진곳읽고> 고구려광개토왕이 남쪽으로 내려와 일본군과 전쟁하였던 것이 광개토비에 기록되어있다는 내용을 주석으로 실으면서 여러가지 증거를 대는 것처럼 하여 마치 정말 가야지방이 일본의 영토였다는 듯이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도 가야를 자신들의 발판이라고 말한 것과 임나를 지키는 것이 어려워졌다라고 말한 점에서 이미 자신들의 땅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8
같은 해「育出版株式社」에서 출판한 교과서에서도 지도에 みまな라고 표시되고 있으며 자신의 나라가 멸망했을 때 그 해를 지도에 쓰듯 지도에 작은 네모칸에 562년みまな멸망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본문의 朝鮮南部にも勢いをのばした의 구절과 高句麗に抗するために、中の南朝にいくども使いを送り、中の皇帝の威をかりて、朝鮮南部での勢いをたもとうと努めた구절에서勢いをのばした, 勢いをたもとう에서 자신들의 힘 기세 라는 말에서부터가 일본이 가야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지배하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말로 볼 수 있었습니다.또한 광개토대왕비문에 써있는 내용을 근거로 하여 자신의 영토일거라고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9
2001년 「株式社扶桑社 에서 출판된 교과서에는 지도에 みまな 라고 표기한 후 괄호 안에 から라고 쓰여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들의 영토였던 みまな 이지만 한국인들은 가야라고 한다고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본문에서도 百は大和朝廷に救援をあおいだ 라는 부분은 일본이 한국에 우위에 있는 것처럼 보이고, もともと資源を求めて…交流をもっていた 라는 부분은, 백제와 우호관계를 유지하여 물자를 주고 받았다는 우리에게 익숙한 역사와는 조금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원래부터 철제 자원이 필요했기 때문에, 군사를 지원해주었다는 필요에 의한 관계, 또한 조공관계로서의 느낌이 더욱 강하게 드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百とみまなを地盤とした日本軍の抵抗にあって、征服は果たせなかった 구절에서도 일본의 영토는 일본군이 지켜내었다, 라며 자신들의 세력이 크고 우위에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듯 말하였고 가야가 일본의 영토임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또한 근거로 다른 교과서들이 작게 주석으로 광개토대왕비문을 언급한 것에 비해 광개토비의 실사를 싣고 본문에서 광개토비에 대해 언급했다는 점에서 자신들의 영토임에 한치의 의심도 없다는 듯이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0
이제 우리가 현재 배우고 있는 교과서 본문 중 일부입니다. 2008년 「日本書籍新社」에서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참고로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2001년 10월 한일정상회담에서 역사문제의 한일공동연구가 합의되어 발족되었습니다. 2005년 5월 3년간의 제1기 활동 끝에 결과보고서가 발표되었으며 2007년 6월 제2기 제1차 전체회의를 갖고 2기 한일 역사공동연구를 공식 재개하였습니다. 또한 2기에는 교과서분과위원회를 신설하였습니다. 그 1년 뒤에 출판 된 교과서입니다. 이점에서 보시면みまな 라는 말은 전혀 언급이 안되어 있으며 한국의 영토를 지배했다는 식의 말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大王は倭王としての地位と、朝鮮半島南部を支配する、軍としての地位を認めてもらおうとつとめていた라는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이때까지도 지위를 확인받으려하였다라는 식으로 찜찜함을 없애진 못했습니다.
11
최근 고고학적 발굴 성과가 이어지면서, 사료가 부족하여 역사에서 비교적 낮게 평가 되어왔던 가야사의 중
자료평가
    아직 평가한 내용이 없습니다.
회원 추천자료
  •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 개정 시도
  •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서 있다. 그들은 예전보다 훨씬 조직적으로 그리고 강도 높게 교과서 왜곡을 시도했다. 그들의 세력은 비록 일본사나 한국사 전공자를 포괄하지는 못하였지만, 정 ․ 관계와 재계 그리고 학계와 법조계를 포함한 지식인 사회 전반을 동원하는 위력을 과시 했다. 또한 그들은 보수언론과 시민들의 지지까지 끌어들였다. 한편으로 그들의 ‘운동’은 일본사회의 전반적 우경화라는 조건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문제의 심각성은

  • 민족주의적 역사관 VS 사실 역사관
  • 교과서 분석색 인단 원내 용분 석교과서 14페이지힘을 겨루며 성장한 세 나라가야의 발전최근 가야를 일본의 속국으로 일본 측에서 주장하고 있다. 이에 교과서에서 가야의 내용을 삼국의 내용과 대등하게 소개하고 가야를 우리 민족의 자랑스런 역사로 인식하게 하여 민족의 주체성을 높이도록 한다.교 과 서 21페이지하나로 뭉친 겨레삼국의 성장 및 발전과 관계되는 역사적 인물들의 업적을 알아보기한국의 기성세대가 교육받은 식민사관

  • [일본에 대한 요구][역사교과서 왜곡수정]일본에 대한 역사교과서 왜곡수정 요구, 일본에 대한 귀환기업단체 보상 요구, 일본에 대한 제2차세계대전 전후처리 요구, 일본에 대한 지식기반경제사회 교육 요구 분석
  • 임나일본부설’은 역사적 사실에 어긋남이 한일 역사학계에서 공통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교과서에서는 이 설이 한일관계사 서술에서 침략을 합리화하는 잘못된 인식의 틀로 작용되고 있다.2. 일본의 역사를 미화시키기 위해 한국사를 폄하하고 있다철저하게 일본의 역사를 미화하고 있는 반면에 일본과 관련된 다른 나라의 역사는 부정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특히 고대부터 현대까지 일본사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비교 대

  • 국사과목은 필수인가 선택인가
  • 교과서 왜곡내용의 주제는 다음과 같다. 상고시대부터 일본은 한국을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 삼국시대부터 우리가 일본과 군신관계를 맺었다는 삼국조공설, 임진왜란의 침략원인과 과정을 미화하는 임진 왜란설, 그리고 그 직후의 조선통신사설, 일본의 침략이 아닌 개국권유로 왜곡해 조선을 정벌하자는 의견인 정한론설, 그 이후 문호개방을 조선에게 이득을 주었다고 주장하는 강화도 사건설, 일본의 침략이 한국을 근대화시켰다는 한국 근대

  • [한일관계] 일본의 역사교과서왜곡
  •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현 일본회의)3) ‘새 역사교과서’의 왜곡된 역사내용 및 한국측 수정요구 84) 일본역사교과서에 대한 한국 및 주변국가들의 대응 22⑴한 국⑵중 국- 24⑶북 한- 25⑷대 만- 26Ⅲ. 1982년과 2001년의 일본교과서 파동의 비교 - 대응의 변화를 중심으로 271. 상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 저작권 관련 사항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진실성에 대하여 레포트샵은 보증하지 아니하며,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 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됩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업자등록번호 220-06-55095 대표.신현웅 주소.서울시 서초구 방배로10길 18, 402호 대표전화.02-539-9392
    개인정보책임자.박정아 통신판매업신고번호 제2017-서울서초-1806호 이메일 help@reportshop.co.kr
    copyright (c) 2003 reoprtshop. steel All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