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대전 전후처리과정 보고서 동맹을 통한 세력균형의 형태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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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제 1차 세계대전 전후처리 과정
♠동맹을 통한 세력균형의 형태를 중심으로♠
-18
서 론
제1차 세계대전은 약 1천만 명의 사망자와 2천만 명의 부상자, 실종자를 낸 미증유의 재난이었다. 전후에 전 세계는 평화에 대한 갈망의 목소리를 높이며 국제연맹을 창설하고 전쟁의 불법화를 규약으로 정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인다. 하지만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고 이에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만다.
1919년 파리강화조약 이후, 승전국이었던 연합국은 어떠한 외교정책을 펼쳤기에 20년 후의 제2차 세계대전을 막지 못하였을까? 즉,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안보체계의 결점이 무엇이었는가를 밝히는 것이 본 연구의 목적이다. 1920년에 국제연맹이 설립된 이후에 국제정치에는 이상주의(Idealism)가 팽배하였다. 이에 따라 평화를 목적으로 하는 규약에 따른 집단안보체제가 등장하였다. 하지만, 국가들은 여전히 국가를 넘어선 초국적인 단체를 인정하지 않았고 여전히 동맹을 통한 세력균형 정책을 유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1930년대에는 되면 국제연맹은 유명무실한 단체로 전락하고 각 국가들은 제1차 세계대전 이전과 같이 동맹 등을 통해 서로를 견제하고자 한다. 일본의 만주침략과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략으로 드러났듯이 각국은 이미 집단안보체제의 작동을 거부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과 같이 각국의 이익에 따라 동맹을 맺고 세력을 형성하고자 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여기서 본 연구조는 히틀러가 독일의 정권을 잡은 1933년부터 전쟁을 일으킨 1939년 까지 왜 주변의 강대국들은 이를 효과적으로 제재할 만한 동맹이 존재하지 않았는가에 의문을 가졌다. 적어도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3국 협상과 3국 동맹이라고 하였고 세력균형의 실패로 전쟁이 발발하였다. 하지만 아직 강대국의 면모를 갖추지 못했던 히틀러가 등장한 1933년에도 전쟁이 발발하던 1939년에도 독일을 경계하기 위한 영국, 프랑스, 소련의 강력한 동맹은 존재하지 않았다.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략할 때에야 비로소 영국과 프랑스는 상호 동맹을 맺고 독일에 대항한다.
이에 따라 본 장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동맹상황 그중에서도 1930년대에 초점을 맞추어 강대국들 간의 세력균형정책을 분석하고자 한다. 1930년대의 세력균형형태를 분석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을 막지 못했던 제1차 세계대전 전후의 안보체계의 허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상주의와 집단안보체제의 한계를 찾는 데에서만 제2차 세계대전의 원인을 찾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비록 당시의 집단안보체제의 한계가 전쟁을 일으킨 원인이었기는 하지만 실제 각국들의 정책을 살펴보면 이미 집단안보체제에서 벗어나서 독자적으로 동맹 세력을 구축하려는 노력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에 앞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유와 경과 그리고 전후 처리과정을 기술하였다. 왜냐하면 1930년대의 동맹의 형태는 제1차 세계대전과 전후처리과정 후에 연계되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본 론
Ⅰ. 제 1차 세계대전(World WarⅠ)의 발발과 경과 Albrecht-Carrie, Rene / 김영식, 이봉철 共譯, [유럽외교사 下 : 비엔나 회의 이후], (서울:까치, 1982) 참조
1. 전쟁의 배경
(1) 독일의 제국주의적 정책과 국제적 긴장 강화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 총리 실각 후 황제 빌헬름 2세(Wilhelm II)는 적극적인 세계정책을 추진하고 군비 확장을 도모하게 된다. 비스마르크시대에 있어서도 열강의 뒤를 따라 아프리카와 남태평양 그리고 중국 등으로 진출하였으나 이는 어떤 의미에서 열강의 세계분할에 한 몫 보자는 것이지 열강의 어느 특정 세력권이나 이권에 대한 도전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1900년경 열강의 세계분할이 거의 완료되었을 때까지 독일은 계속 강력하게 세계정책을 추구하고 기존 세력권이나 이권을 무시하여 국제사회의 긴장을 촉발하게 된다.
(2) 열강국가들과의 충돌
독일 황제 빌헬름 2세(Wilhelm II)는 세계분할이 거의 끝날 무렵 터키 경영에 큰 관심을 가지고 직접 그곳을 방문하는 등(1898)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여 비잔티움(Byzantium)과 바그다드(Baghdad)간의 철도 부설권을 따내고 이를 베를린(Berlin)과 연결하는, 이른 바 3B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려 하였다. 이러한 독일의 세계정책의 기본방향은 영국의 남아공의 케이프州(Cape Province)와 이집트의 카이로(Cairo), 그리고 인도의 캘커타(Calcutta)를 연결하는 3C정책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었을 뿐 아니라 페테르부르크(Peterburg)에서 페르시아만(Persian Gulf)까지 연결시키려는 러시아의 정책 2P정책과도 정면으로 대립하는 것이었다. 유럽의 국제적 불안을 세계대전으로까지 몰고 간 중요한 기본적인 요인은 바로 여기에 있었고, 장기간에 걸쳐 대립을 거듭해 오던 영국과 러시아가 서둘러 타협을 모색하고 협상을 맺은 주된 이유도 여기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아프리카의 남북부에 위치하고 있는 모로코에 대하여 프랑스는 영불협상을 통하여 이곳에서의 우월한 지위와 영국의 지원을 약속받고 있었는데 바로 그 협상이 맺어진 다음해(1905) 독일 황제 빌헬름은 돌연 모로코의 탕헤르항(Tangier)에 상륙하여 모로코의 영토보전과 문호개방을 주장함으로써 프랑스의 긴장을 촉발시킨다. 이듬해 국제회의에서 프랑스는 영국 등의 지지를 얻어 모로코에서의 우월한 지위를 확인받고 고립된 독일이 물러섬으로써 일단락을 지었지만, 1911년 봄 모로코에서 내란이 발생하여 프랑스가 이를 진압하기 위해 출병 하자 독일은 군함을 아가디르(Agadir)에 파견하여 프랑스를 위협하여 다시 독일과 프랑스의 관계는 전쟁 직전까지 악화되었다. 그러나 영국이 강하게 프랑스를 지지하고 나섰기 때문에 독일은 이권을 양보하고 프랑스는 모로코를 보호령으로 삼았다.
참고문헌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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