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골 정권하의 프랑스 제5공화국 1958 1969 드골과 골리즘 드골 사임 프랑스 제4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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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골 정권하의 프랑스 제5공화국(1958~1969)
드골과 골리즘
골리즘이란 프랑스의 군인이자 정치가인 드골(De Gaulle. Cgarles Andre Joseph Marie 1890 ~ 1970)과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내세운 정치적인 주장 또는 정치체계를 의미한다. 즉 대통령 사를 드골의 「강력한 유럽, 강력한 프랑스 건설」이라는 정치적 목표와 이를 실현하기 위한 드골의 여러 가지 정치이념을 말한다. 골리즘의 발단이라고 볼 수 있는 드골의 정치적 주장이 처음 나타난 것은 1930년대 초반에 쓴 두 권의 저서에서 볼 수 있다, 그는 1932년에 쓴 <칼날>이라는 저서에서 "……힘은 인민에 대한 법률을 만들고, 그 운명을 지배한다. ……국가방위의 광휘(光輝) 없이는 정치가의 위대한 광영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듯 당시의 불리한 상황 아래서 내리막길을 걸어가던 프랑스의 영광을 되찾자는 주장을 했다. 한편으로 이 주장은 일견 군사력에 대한 찬양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드골은 1958년 수상이 된 이후 대통령에게 강력한 권한을 부여하는 대통령 직선제 실행했고 프랑스의 영광을 내세우면서 국민통일의 상징으로 알제리전쟁에 따른 내전 위기를 극복하였고, 1962년 전쟁이 종결된 이후로는 중공 승인·동유럽 접근·서독과의 제휴 등의 외교정책, 핵무기 강화를 중심으로 하는 군비의 근대화를 이룩함으로써 프랑스의 국제적 지위 향상을 도모하였다. 요약하자면 골리즘이란 강력한 리더쉽을 중심으로 군사력이 뒷받침된 국가와 민족의 영광을 실현하자는 게 골리즘이라고 말할 수 있다
드골은 릴에서 출생하여 독실한 가톨릭 신자 집안에서 자랐다. 드골의 가문은 역대로 숱한 역사가와 작가들을 배출했으며 아버지는 아들에게 철학과 문학을 가르쳤으나, 샤를은 문학이나 철학보다는 군사학에 관심을 보였다.1912년 생시르 사관 학교를 졸업하고, 제1차 세계대전에 중위로 참가하여 최고 훈장을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 때 베르됭 전투에 참가한 그는 3번씩이나 부상을 입고 2년 8개월 동안 포로생활을 했으나 5회에 걸쳐 탈출을 시도했다. 프랑스 육군 수훈보고서에는 3차례 드골의 이름이 기록, 언급되었다. 1918년 제1차 전쟁이 끝난 후 페탱 참모 총장의 직속 장교, 중동 제국에의 군사 사절단장을 거쳐, 최고 국방 회의 사무국장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군 시절의 드골 장군드골은 명석하고 성실하며 열의에 찬 장교로서 군대경력을 거치는 동안 자신감과 용기, 그리고 독창적인 사고를 갖춘 인물로 유명했다.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제4기갑 사단을 이끌고 랑 아브빌에서 독일군을 막았다. 1927년부터 1929년까지 2년간 라인란트 점령군의 육군소령으로 복무했다.
그는 1932년 “칼의 날개” 란 저서에서 프랑스의 정치사와 군사전략을 언급하였으며 곧이어 “직업군인을 향하여” 라는 저서를 출판하여 기갑부대를 현대화할 것을 정부에 건의하고 나섰다. 당시 패탱 원수는 이에 관심을 표하지 않아 양자간에 불화가 조성되기도 했다. 그러나 나중에 들어선 래노 내각 (Reynaud Cabinet)에서 그의 주장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1940년에 국방성 차관으로 임명했지만 때가 너무나 늦어서 군의 개혁을 단행하지 못한 채 나치의 침략에 무력하게 패하고 말았다. 그 결과, 1940년 6월 17일 런던으로 망명, 자유프랑스를 수립하고 전열을 가다듬으려고 했으나 큰 세력을 규합하지 못하고 실패했다. 단지 6월 18일 대 국민 연설을 통해 국민을 감동시켰을 뿐이다.
다시 1936~38년 라인란트 점령군 소령으로 복무하면서 독일의 침공 가능성과 프랑스군의 허술한 방비상태를 알게 되었으며, 2년간 중동에서 근무한 후 중령으로 승진하여 4년 동안 국방위원회 사무국 직원으로 근무했다. 다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드골은 제5군 소속 기갑여단 이끌고 전쟁에 참전하였다. 1940년 5월 제4기갑사단 지휘관으로 부임하였다. 2차례의 전차전에서 자신의 독창적인 이론을 적용했던 그는 정력적이며 대담하고 뛰어난 지휘관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1940년 6월 레노 총리 아래서 국방부 육군담당 차관이 되었으나, 독일과의 휴전을 모색하고 있던 페탱 원수가 레노를 축출,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하자 런던으로 망명하여, 자유 프랑스 민족회의를 결성하였다. 영국으로 망명한 드골은 6월 18일 런던에서 프랑스의 레지스탕스를 독려하였고, 나치 치하의 프랑스인 동포들을 향해 프랑스어 라디오 방송을 내보냈고 자신을 중심으로 대(對) 독일 항전을 계속하자고 호소했다. 1940년 8월 2일 비시 정부는 드골을 궐석재판에 세워 계급박탈, 재산몰수와 함께 사형을 선고하였다. 그러나 영국 정부와 드골의 관계는 원만하지 못했으며, 때때로 드골의 오만한 성격과 성급한 기질 때문에 영국과 수시로 충돌, 긴장이 고조되었다. 1943년 드골은 자유 프랑스 민족회의를 알제리로 옮겨 프랑스 국민해방위원회로 개편하고 앙리 지로 장군과 함께 공동위원장에 취임했다. 프랑스 내에서 드골의 평판은 부정적이었다. 좌파 정치인들은 가톨릭교도인 군인 출신을 불신, 기피하였고, 우익 진영은 그를 국민적 영웅인 페탱 장군을 배신한 반역자 정도로 취급하였다. 그러나 런던으로부터의 방송 출연과 자유 프랑스 위원회의 활동 그리고 자신의 조직이나 영국 비밀첩보기관을 통한 레지스탕스 지하운동에의 협조 등은 프랑스 내에서 드골의 지도력을 점차 부각시켜갔다. 종전 이후에도 별로 주목받지 못하다가 파리 해방 이후, 연합국들은 드골의 위상을 인정하게 되었다.
1944년에 노르만디 상륙작전에 참가하여 파리를 해방시켰다. 그러면서 프랑스의 정치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특히, 그는 제3-4공화국의 정치적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애당초부터 결심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식 의회주의와 정치적 경험에 염증을 느끼기도 했다. 조국 프랑스를 강력하게 만들어야 하겠다는 생각에 몰입하게1944년 프랑스 해방과 함께 임시정부 주석에 취임했다. 1944년 9월 9일 드골은 알제리로부터 파리로 개선하였다. 그러나 1946년 1월 20일 임시정부 주석직을 사퇴했는데, 표면상으로는 제정당의 연립내각형성 움직임에 동조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처칠은 드골을 몹시 싫어해 드골의 레지스탕스 운동에 대한 지원을 포기하려고까지 했다. 처칠은 1943년 5월 미국 워싱턴에 머물던 처칠이 런던의 클레먼트 애틀리 부총리와 앤서니 이든 외무장관 등에게 보낸 각종 전문과 비망록에서도 이를 드러냈다.[2] 처칠은 1943년 5월21일 애틀리에게 보낸 전문에서“(드골은 독일과의 전쟁에서) 쓰라린 군사적 패배를 겪었음에도 마치 자신이 모든 프랑스 국민을 대표하는 양 내세우고 있다”고 비난했다. 처칠은 “내 동지들이 일개 정치세력에 불과한 드골을 제거해야 할지를 두고 (영국)의회 및 프랑스국민과 정면으로 맞서야 할 것인지를 시급히 검토해주기 바란다”고 덧붙였다. 처칠은 같은 날 이든에게 보낸 비망록에서 드골을 “영국과 미국에 철저히 비우호적인 인사이며 공산주의에 동조하고 심지어 파시스트적인 성향도 지닌 사람”으로 묘사했다. 처칠은 이든에게 보낸 비망록에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대통령이 자신에게 보낸 서신을 동봉했다. 루스벨트도 서신에서 “드골이 정직한 사람일지는 모르지만 스스로를 메시아라고 착각하는 ‘구세주 콤플렉스’를 갖고 있는 것 같다”고 반감을 표시했다. 그러나 영국 각료들은 드골 지원정책이 급변할 경우에 초래될 위험성을 경고하면서 드골 지원을 주장했다. 윈스턴 처칠은 숙고끝에 내각의 뜻에 따랐다. 그러나 처칠은 계속 드골을 불신하였다.
드골은 자신의 지도자적인 자질과 임무에 대한 절대적인 신념 하나로 조국에 헌신하고, 국익에 위배된다고 생각되면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투쟁에 몰입하는 강인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하여 프랑스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된 드골은 국민의 후원 속에서 본격적인 「위대한 프랑스」의 재건을 위한 주요 정책들을 수행해 나가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드골의 사상정책행동 등의 가장 근본이고, 최상에 위치한 목표였다. 드골의 이러한 노력은 〈골리즘〉이라는 독자적인 용어로 표현될 만큼 세계사적으로 위대하고 가치 있었던 드골 자신만의 정책 이념이라 할 수 있다. 드골의 정치생애를 일관하였던 골리즘의 핵심적인 요소인 “강력한 유럽, 강력한 프랑스 건설”은 다음 3가지의 드골의 견해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첫째, 민족(nation)과 역사인식이다. 드골은 민족은 무엇보다도 프랑스의 역사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인식을 했다. 따라서 역사의식을 떠나서 민족을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민족을 국가(state) 체제 속에서 이와 실질적으로 연결, 결합되어 존속한다는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는 국가가 정당하고 강력해야 민족이 완성된다는 정치철학에 투철하였다.
둘째, 민족주의(nationalism) 에 대한 애착심이 대단하였다. 프랑스 민족과 국가는 민족주의 이념으로 반영되어 영속적으로 발전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의 민족주의관은 단순히 민족적인 자부심에 그치지 않고 민족과 국가 발전의 동력으로 보았다.
셋째, 독특한 힘의 개념이다. 그는 힘이 프랑스의 영광과 위대성을 되살리는데 필요하다고 생각했었다. 힘을 구축함으로써만 오늘날 조국을 강대국 지위에 올려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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