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과 신앙은 어떤 관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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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 “신심과 신앙은 어떤 관계인가?”-
가톨릭 경신례 안에서 개별적 신심의 다양한 형태들
경신례란 인간이 하느님께 드리는 예(禮)이므로 믿음을 가진 이에게는 가장 기본적인 예절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의 마음과 의지는 외적인 태도와 행동으로 드러나게 되므로, 하느님께 드리는 흠숭과 예절 표현은 바로 인간 내면의 외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경신례란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느님께 드리는 참된 예배를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온 우주만물을 사랑으로 내시어 창조물 스스로가 하느님께서 주신 본래의 목적과 의도에 따라 움직여지도록 섭리하셨다. 세상의 자연 사물들은 있는 모습 그대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찬미한다. 산의 나무들, 공중의 새들, 바다 속의 물고기들, 온갖 동물들 등은 그 자체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그 존재의 목적대로 살아감으로써 하느님의 평화를 드러낸다 :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얘기하고, 창공은 그 손수하신 일을 알려 주도다(시편 19, 1)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당신 모상대로 지으시어 이성과 자유의지, 감성으로서 당신을 찬미하고 영광을 드리도록 하신 것이다. 인간은 자기 내면의 양심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의지로서 따르며, 감성으로써 하느님을 찬미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경신례를 드리는 인간은 종교적 인간(Homo religiosus)이다. 이 종교적 인간은 종교에 따라 그 경신례의 대상이 다르게 나타날 수 있는데, 옛날에는 어떤 큰 힘이 있고 신비스럽게 느껴지던 사물들이 그 종교적 대상이었다. 그래서 태양, 달, 큰 나무, 바위, 크고 높은 산 등을 의인화시켜 숭배의 대상으로 삼고 그 앞에 엎드려 절하고 빌곤 했다. 오늘날도 이러한 믿음들을 간직한 종교적 형태가 발견되고 있지만, 문명과 과학이 발달됨에 따라 점차로 사라지고 있다. 성서에서는 야훼 하느님만이 참된 창조주이시며 온 땅과 온 우주의 주인이심을 선포한다. 하늘과 땅 위에 있는 모든 존재가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된 피조물에 불과한 것이며, 이 피조물들은 하느님께 경배할 의무가 있음을 알려준다. 자연 사물은 창조주 하느님께서 그 본성자체에 박아주신 질서와 법칙에 순응함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따르게 된다. 인간의 하느님께 대한 경배는 여러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인간의 몸짓, 무릎을 꿇는 행위, 손을 합장하는 행위, 두 손을 벌려 기도하는 모습 등은 인간이 지닌 육신을 가지고 하느님께 대한 흠숭을 온 몸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인간이 지닌 언어능력을 통해 하느님께 대한 찬미와 영광을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인간은 하느님께 드리는 경신례를 통해 인간의 의미와 그 목적을 드러내고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은총을 받는다. 그러므로 인간의 경신례는 두 가지 방향의 내적 움직임이 포함되어 있다. 즉 인간으로부터 하느님께 향하는 방향과 하느님으로부터 인간에게로 내려오는 방향의 움직임이 있다. 전자에서는 인간측으로부터 찬미, 흠숭, 감사의 행위가 하느님께 올라가며, 후자에서는 하느님 편으로부터 은혜, 강복, 용서가 인간에게로 내려오는 것이다.
가톨릭 신자에게는 하느님께 드리는 경신예절의 극치가 바로 미사성제 거행에서 드러난다.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대리하는 사제와 함께 주의 제단에 모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찬미와 감사와 흠숭을 드리며 또한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은혜로운 말씀과 죄의 용서와 복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거룩한 경신예절인 미사성제에 몸과 마음을 깨끗이 준비하여 경건하게 참여함으로써 하느님께 기쁨과 영광이 되고 인간에게는 유익함이 있도록 예배해야 할 것이다. 참조 : 『가톨릭 신문』 (1993년 5월 2일) ; [5분명상교리], 329-332쪽.
⊙ 교회의 가르침 : 세속화된 세상 안에서 하느님께 드리는 진정한 경신례
교리교육은 금세기의 대다수 사람들이 하느님을 도외시하거나 나아가서는 하느님의 부재를 심각하게 느끼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체 할 수 없다. 이와 같은 현상은 현대 문명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세속화 과정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신앙의 위기를 가져오기는 하지만, 우리가 하느님의 면전에서 우리의 종교적 자세를 더욱 정화하고 "하느님께서 너도 몰래 너를 보살피셨다. 이스라엘의 하느님, 구세주께서 너를 보살피셨다"(이사 45, 15)고 하신 그분의 신비 앞에서 마땅히 더욱 겸손해지는 데 도움이 된다. 이러한 빛 안에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며 또한 그분을 영광스럽게 해 드리는 것인 경신례의 참된 본질을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경신례는 모든 활동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수행하게 하고 사랑으로 주님께로부터 받은 재능을 충실하게 성장시킬 것을 요구하고 있다(마태 25, 14 참조). 신자들은 전례 안에서 애덕과 평화와 정의의 활동에 의한 모든 결실을 겸손되이 하느님께 봉헌하며, 인간을 위해서 당신의 몸과 피를 바치시는 그리스도와 친교를 나누고, 세상에서 사랑으로 진리를 외치는데 필요한 생명과 은총의 말씀을 그 안에서 얻는다(에페 4, 15 참조). 참조 : 『교리교육 지침서』(DCG) 48항
1) 성무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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