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 이전의 북한의 모습 1945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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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이전의 북한의 모습(1945~60)
1. 해방과 분단
1945년 8월 6일 미국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였고 이틀 후 8월 8일에는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하였으며, 같은 날 소련이 대일전에 참전하게 됨으로써 태평양 전쟁은 종전으로 치닫게 된다. 얄타회담에서 미국과 대일전 참전을 약속한 소련은 158만의 극동군을 동원하여 일본과의 전쟁에 참여하게 되는데, 결국 8월 15일 전쟁은 일본이 포츠담 회담의 제의를 수락, 무조건 항복을 선언함으로써 끝난다. 1945년 8월 15일의 해방은 장기간에 걸친 우리 민족의 해방 투쟁과 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연합국이 승리한 결과 초래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 민족은 온전한 통일은 아니었지만 신라에 의해 통일이 된 아래 일제에 의해 식민 지배를 받기 전까지 단일의 국가를 형성해 왔다.
그러나 제 2 차 세계대전에서 패전국 일본의 항복으로 해방된 우리 민족은 당연히 통일된 민족 국가의 수립을 원하였지만, 전승국 연합국은 이러한 기대와는 달리 한반도를 분단 상태로 처리하였다.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분할 점령되었고, 일본은 사할린이 소련에 반환되었을 뿐 분할점령되지 않고, 단지 패전국 일본의 식민지였을 뿐인 한국이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할점령되었다. 특히 일본의 항복을 접수하기 위한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분할점령은 우리 민족과 영토를 분단에 이르게 한 직접적인 책임을 면키 어렵다. 이는 우리 민족의 자주적인 해방 투쟁보다도 국제적 요인, 즉 연합국이 제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부산물로서 해방이 주어졌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도 민족 해방의 노력이 통일국가의 수립으로 이어지지 못한 것은 우리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미국과 소련의 분할점령이라는 국제적 요인과 함께 민족 내부의 분열 역시 분단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이는 해방 당시 좌우익간 해방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차이를 보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좌익 진영의 경우 해방을 소련과 미국을 위시한 연합국의 승리에 의해 주어진 것으로, 즉 국제적인 힘에 의해 해방이 이루어진 것으로 인식하였다. 반면에 우익 진영의 경우 전반적으로 연합국의 승리보다는 민족의 독립 운동이 해방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파악하였다. 다시 말해, 좌익 진영은 해방의 국제적 관련성을 강조한 반면, 우익 진영은 민족적 역량에 의한 국제적 관련성을 강조하였다. 물론 이에 따라 좌우익간 해방의 과제도 달라진다.
바로 좌우 양측이 해방의 의미와 과제를 달리 규정하고, 정권 장악을 위해 세력을 규합해 가는 과정에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한 미국과 소련은 남북한에 각기 우호적인 정치체계를 정착시키게 되는 것이 바로 분단과정이다.
일본의 패망이 짙어지자 미국무성과 군부는 연합국 정부와 협의하기 위해 대안을 마련하게 되는데, 미군은 가능한 한 한반도의 북쪽에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기로 정하였다. 당시 미국 군부는 소련군의 진공 추세로 보아 미군이 한반도에 도착하기 전까지 소련군이 한반도 남쪽까지 진격할 것이라고 확신하여, 한반도 상륙에 당장 활용할 병력이 없었던 조건 속에서 한반도 전체가 소련군의 점령 하에 놓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 미소 양국 군대에 의한 일본군의 무장 해제선을 급히 결정하여 소련의 동의를 얻고자 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 북위 38선이었으며, 38선은 서울을 포함하여 가능한 한 북쪽에서 소련군의 남진을 막으면서 미군이 최단 시간 안에 도착 할 수 있는 북방한계선이었던 것이다.
한편, 「일반명령 제 1호」에 따라 소련은 제 25군 사령관 치스티아코프(Ivan Chiastiakov)대장의 지휘하에 북한을 점령하였으며, 미국은 제 24군단 하지(John Hodge)중장의 지휘하에 남한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1945년 12월 「모스크바 삼상협정」이 나오기 전까지 한반도를 점령한 미국과 소련은 각기 군정청을 세워 이 기관을 통한 직접 통치의 방식과 군정청을 세우지 않는 간접 통치의 방식을 취하였다.
이렇듯 해방과 더불어 미소의 한반도 분할점령으로 빚어진 우리 영토의 분단은 1945년 12월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과 도출된 모스크바 협정을 통해 한반도 분단구조에 내재해 있던 내쟁적 성격을 표면화 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어 좌우익간 이념적 분단으로 이어지게 된다. 전후 세계문제와 함께 한반도 문제를 다루기 위해 12월 16일부터 열린 모스크바 삼상회의는 27일 한반도 문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의 협정을 발표하였다. 즉 한반도에 민주주의임시정부를 수립하며, 이에 대한 방안을 강구하기 위해 미소 공동위원회를 설치하고, 미소 공동위원회는 임시정부와 협의하여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것이다.
한반도 문제에 관한 모스크바 협정이 국내에 알려진 12월 28일 이후 국내 정치계는 찬탁과 반탁의 입장으로 나뉘어지고 그들간의 대립과 투쟁을 전개하게 된다. 그런데 모스크바 협정은 흔히 알려졌듯이 신탁통치안의 발전이면서도 탁치문제를 주제로 하지 않고 임시정부의 수립이 주된 내용이었다. 그러나 모스크바 협정에 대한 찬반운동은 찬탁반탁운동으로 변질되어 좌우익간 이념대립으로 치닫게 된다.
이같은 찬반탁의 내쟁과 더불어 미국과 소련이 각기 한반도에 자신에게 우호적인 정부의 수립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소 공동위원회의 결렬과 한반도에서의 통일정부 수립의 실패는 예견된 일이었다. 즉 모스크바 협정에 대한 좌우익간의 치열한 대결이 전개되는 가운데 개최된 미소 공위회는 미소의 상이한 이해관계로 말미암아 결렬되기에 이른다. 양국은 자국의 이데올로기에 부합하는 정당과 사회단체가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기를 원했는데, 이는 구체적으로 장차 한반도에 수립될 입시정부에 참여할 정당과 사회단체의 자격문제로 표현되었다. 따라서 1946년 3월 20일부터 5월 8일까지 서울에서 열린 제 1차 미소 공동 위원회는 무기휴회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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