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속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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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의 방
소양이를 만났던 것은 순전히 선생님의 소개 때문이었다. 수능이라는 대입을 2년 앞두고서 만난 소양이는 퍽이나 불편한 존재였다. 그럭저럭 사는 중산층에 나무랄 것 없는 재주까지 가졌던 소양이었기에 도무지 탐탁지 않게 느껴졌다. 비록 1년 재수를 했다고는 하나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지 않았던가. 그랬기에 더욱이 가족 몰래 휴학하고 이리저리 방황하는 모습이 객기로만 보여 졌었다.
그래, 휴학할 수도 있다. 스무 살 때 자격증을 따고, 스무 한 살 때 복수전공을 하고 이렇게 인생계획을 세워뒀던 나로서는 휴학이 자기개발을 위한 것이라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소양이는 아니었다. 단지 껍데기일 뿐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가족들과의 상의도 없이 학교를 그만둔 것이었다. 그런 모습에 난 실망을 참 많이도 했었다. 가족들의 생각은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또 대학교라는 곳도 쉽게 다닐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 당시 엘리트의 전유물이라고 할 만큼 지성의 복합체였던 것이다. 게다가 요즘 같은 경우에는 등록금 낼 돈이 없어 학교를 못 다니는 아이들도 많다. 이런 아이들에 비해 대학교에 안심하고 다닐 수 있는 소양이는 오히려 감사히 여겨야 하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소양이의 결정이 너무 쉽게 결정해버린 듯 경솔해보였고 독단적으로 보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소양이의 결정을 이해할 법도 하다. 나도 대학과 이상과의 괴리가 너무나 크다는 것을 몸소 느낀 바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대학의 교육은 주입식 교육을 벗어난 토론식 교육을 할 거라고 기대했건만 고등학교와 별로 다를 바 없었다. 또 대학생활을 하면서 내가 하고픈 대로 할 수 없다는 현실에 좌절하면서도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휴학하여 나 자신을 찾고 싶었으나 가족들의 눈치와 사회적 실패자라는 시선이 두려워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소양이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휴학을 했다. 후에 가족들이 알았어도 그대로 밀어붙이는 결단력을 발휘했다. 그런 점에서 소양이는 당돌했다.
휴학까지 감행하면서까지 찾으려고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흔히들 진실이라고 말하는 것, 그러나 그 진실이라는 것도 과연 존재하기나 하는 걸까. 사람들 눈에 보여 지는 건 다 저마다 다른데 말이다. 그런 면에서 소양이가 찾으려했던 것은 진실과 같은 모호하고도 추상적인 단어가 아니라 자신을 찾는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이 든다. 그렇게 자신을 찾기 위해 뛰어든 것이 사회운동이었다. 사회운동을 하다가도 끝내 그만 두었던 것은 아마 그 속에서도 자신을 찾을 수 없어서였을 것이다. 소양이를 안 지 얼마 안 되었던 난, 사회운동에 끝까지 남아있지 못함을 오히려 비판했었다. 대학생이면 문제의식을 가지고서 뛰어들어야 하는 거 아니냐면서 말이다. 소양이가 사회 문제를 회피한 것은 아니었지만 주위의 의식에 마지못해 동참한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내가 대학생이 되고 ‘미국산 쇠고기’문제로 촛불집회가 열리는 지금, 더욱 소양이 생각이 났다. 언론매체에서 촛불집회에 관한 소식을 들려주면서 나도 촛불집회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시간을 내서라도 참여해야겠다는 마음을 일게 했다. 그리하여 집에도 내려갈 겸 창원에서 촛불집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촛불집회에서는 시민들의 자유발언과 노래부르기, 구호외치기, 거리행진으로 프로그램을 진행해나갔다. 그런데 촛불집회를 참여함에 있어서 자꾸 심기가 불편했다. 시민들이 써놓은 종이에는 MB정부를 타도하다 못해 욕지거리로 그 내용이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촛불 집회가 MB정부의 정책 시정을 요구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명박 대통령의 퇴진도 요구하고 있었다. 거리행진을 할 때 한편으로는 멀뚱멀뚱하게 쳐다보는 사람들과 교통체증이 야기되어 불만을 터뜨리는 사람들을 볼 때는 자그만 분노가 일어났다. 소양이도 사회운동을 하다 이런 느낌이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회운동을 하다가 중간에 빠진 것일 수도 있다. 이렇듯 나처럼 심적 혼란을 겪었을 거란 생각이 그때서야 들기 시작했고 소양이의 결정에 공감하며 소양이에 대한 오해를 풀어갔다.
소양이는 사회운동뿐만 아니라 호스티스로 일해보기도 하고 종로의 골목에서 ‘썸싱’이란 곳도 가는 등 부지런히 자신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오히려 소양이는 종로에서 자신을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자신을 내맡겨버렸다. 자신을 소중히 할 줄 모르는 모습에 혀를 내두르게 만들기도 했다. 자신을 찾는 방법에서 꼭 중년 아저씨와 관계를 가질 뻔한 만큼 감정의 교류 없이 육체적 교류만 고집하는 것이 과연 적합한 방법이었을까 의문이 들었다. 심지어 희중이라는 남자친구와도 육체적 관계를 스포츠 다루듯 말하지 않았던가. 소양이가 행한 방법이 결코 옳은 것만은 아니지만 소양이라는 인물을 내 머릿속에 오랫동안 기억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소양이는 당당하기도 했다. ‘여성은 담배를 피어서는 안 된다’란 사회적 통념 앞에서 떳떳하게 담배를 피었기 때문이었다. 카페에서 곧 마찰이 빚어졌긴 했지만 카페에 나와서도 꿋꿋이 담배를 줄기차게 피워댔다. 카페와의 마찰에서 결코 진 것이 아니라 양보했다는 것을 명시하듯이 말이다. 남자친구까지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못한 것에 대해서 서운해 하지도 않았다. 대신 남자친구에게 자신의 의견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명확히 말했을 뿐이다. 사회에 어느 정도 타협하면서도 자신의 주관을 관철시키는 고집스런 면이 속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그 이유를 아직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의 차별이 부분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라고 추측해 본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소양이는 억세기도 했다. 자신의 가족들을 대하는 태도나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들에 관해선 적어도 그랬다. 자신의 부모를 동물로 격하시키기도 했고 할머니를 속물로 치부하기도 했다. 아버지와의 갈등 속에서도 아버지의 말씀에 맞받아치기도 했으며 가족들의 관심을 무시로 일관하기도 했다. 종로에서건 친구들에서건 그 속에 있으면서도 때론 냉소적으로 그들과 거리를 두기도 했었다. 제 자신에 대해서도 자조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는데 그 결과 손목을 긋고 자살하는 극단으로 치닫게 했다.
소양이가 산 삶은 잘못되었다고 보는 사람들이 더러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봤을 때 소양이는 자신을 찾기 위해서 온 몸으로 부딪혀봤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자신을 찾는 방법이 다양했을 뿐. 그 방법들을 통해서도 자신을 찾지 못해 타락의 길을 걷게 되고 끝내 희망 없는 세상을 등진 것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물론, 자살을 했다는 것에서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또 소양이의 언니처럼 청춘의 시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득권에 편중되어 잘 살아가는 모습은 소양이의 방황을 더욱 부정적으로 비출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을 찾는 다는 것은 대단한 결심이 필요한 것이고 자신의 꿈을 찾는 것이 아닐까. 자신의 꿈을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도 없었던 소양이었기에 자신의 방에서조차 안식을 취하지 못했던 것이리라.
소양, 매력적인 인물은 사실 아니다. 출중한 외모를 가진 것도 아니고, 뛰어난 재능을 가진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갈등 상황을 슬기롭게 헤쳐 나가 해피엔딩으로 결말이 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모진 상황을 극복하고 잘 살아가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찾기 위해 아등바등 싸우고 방황하는 이들도 있음을 말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어른이 된 우리들에게 저마다 자신을 찾는 방황을 하고 있는 지 혹은 해 보았는지 묻고 싶었다. 방황을 겪어봤다면 소양이처럼 온 몸으로 사회에 저항도 해보고 느껴도 보았는지, 혹시 자신을 찾지도 않고 현실에 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닌 지 말이다.
내가 바라본 소양이는 소양이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과 환경들이 위화감마저 들 정도로 독특한 아이였다. 그런 소양이의 방황을 두고 “방황은 청춘의 특권 아녜요?”하고 톡 쏘아붙이듯 말하던 경옥이가 떠오른다. 소양이는 경옥이의 말처럼 청춘의 특권을 맘껏 누리다 간 것일까. 소양이의 방황이 후에 방종의 의미로 퇴색된 바가 없지 않아 있지만 그래도 자신을 찾는 방황으로 빛을 뿜어내던 아이였다. 이렇듯 자신을 찾는 방황이 청춘의 특권이라면 한 번 누려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당신, 청춘의 특권을 누렸는가 혹은 누려볼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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