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국립묘지를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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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1. 4.19 국립묘지를 방문하면서
☞ 2005년 5월 14일 4.19국립묘지를 방문하는 것으로 조원들과 이야기를 마치고 나는 매우 가슴이 설렜다. 15년 동안 내가 살던 곳이었기에 나는 고향을 찾아간다는 기분이 들었고 얼마나 많이 변했을까 하는 기대감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조원들과 강변 역에서 만나 수유역에 내려 마을버스를 타고 4.19 국립묘지에 들어섰다. 예전과 달라진 모습은 거의 없었지만 방문하는 사람들은 매년 더 많아지는 거 같았다. 4.19국립묘지 근처에 살며 자주 들렸던 내가 안내자 역할을 하며 조원들과 함께 4.19국립묘지를 둘러보았다. 과거, 4.19국립묘지는 연못 하나에 아무 것도 없던 정말 초라한 모습이었다. 공사 기간 중에 현장에 가서 흙을 옮기면서도 얼마나 많이 변할 수 있을까하는 걱정을 할 정도로 그 당시 4.19국립묘지의 모습은 초라함의 그 자체였다. 그러나 공사 후 4.19국립묘지는 역사 교육의 현장으로 모습을 바꾸었고 도착해서 내 스스로 눈을 의심했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방문해 있었다. 나는 과거에 비해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4.19국립묘지의 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어렸을 때보다 더 진지한 태도로 둘러보며 그 당시의 정열을 느껴보고자 했다. 그렇게 조원들과 4.19국립묘지를 둘러보고 1시경 나는 발걸음을 집으로 옮겼다.
2. 4.19혁명에서의 학생의 역할과 위치
☞ 4.19혁명 때 학생들은 왜 수업을 포기하면서 까지 위험한 시위를 계속하였을까?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통해 그 당시 학생들의 위치와 혁명 당시 학생들이 주체가 되었던 이유, 그리고 그들의 역할에 대해 알 수 있을 것이다. 과연 그들은 왜 수업을 포기하면서 까지 위험한 시위를 계속하였을까? (김주열 학생 사건을 예로 살펴보고자 한다.)
답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학생 집단의 특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학생 집단의 대표적 특성 중의 하나는 동료의식이다. 그들은 설령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교복을 입은 학생들을 보며 서로 동료의식을 느꼈다. 그리고 학생 집단은 어떠한 일에 대해 즉각적으로 그리고 매우 과감하게 행동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학생 집단의 사회적 위치와도 관련이 있는데 그것은 밑에서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이러한 학생 집단은 해방 전 일제시대에서부터 큰 힘을 발휘했었다. 즉 학생 집단은 언제든지 숨겨진 힘을 발산할 수 있는 시한폭탄과 같은 존재였고 60년 당시 이승만 정권에 대해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는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주열 군의 시체사진이 부산일보에 실리면서 학생들은 폭발했고 동료의식이 강했던 학생들은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모두들 책을 덮고 밖으로 뛰어나왔다. 더욱이 같은 학생이 참혹한 죽음을 당한 모습에 학생들은 자신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두려움까지 느끼게 되었고 즉각적으로 매우 강력한 시위를 계속했었는지도 모른다. 결론적으로 이들의 시위는 김주열 학생의 참혹한 죽음이 자신에게도 다가올 수 있다는 두려움과 같은 학생이라는 동료의식이 동시에 작용한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에 학생들은 수업을 포기하면서까지 위험한 시위 현장에 뛰어들었고 이들의 시위는 점차 약해지던 혁명의 불꽃을 되살려 놓았다. 과연 이 당시 학생들은 어떠한 사회적 위치에 속해있었을까?
학생들은 그 당시 어린이도 아닌 성인도 아닌 과도기적 위치에 속해 있었다. 지금 우리 교육현장에서 쓰이고 있는 말로 표현하자면 그들은 사춘기 청소년으로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는 집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사회에서 성인으로 인정받기를 원하지만 실질적으로 성인으로 인정받지 못했기에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즉 쉽게 감정적으로 폭발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만큼 성인 집단에 비해서 치밀함과 계획성 등은 부족했지만 그들에게는 성인 집단과는 다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떠한 정의감이 살아 숨쉬고 있었다. 즉 이러한 학생 집단의 사회적 위치 때문에 그들은 부당한 정권에 대해 더더욱 분노하고 거리로 뛰어나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른 관점에서는 이러한 모습들이 무모하다고도 비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러한 학생들의 모습이 없었다면 4.19혁명은 영원히 일어날 수 없었던 상상 속의 혁명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왜 학생들은 4.19혁명의 주체세력으로 나서야 했는가? 이들은 정말 어쩔 수 없는 사회적 상황에서 혁명의 주체가 되어야만 했다. 기성세대들은 모두 일제시대와 이승만 독재시대를 겪으며 소극적으로 비판의 목소리만을 냈다. 심지어는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자유민주주의를 가르쳤던 교수들조차도 초창기에는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었다. 즉 달리 말하면 혁명을 주도할 어떠한 주체세력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에 학생들은 혁명의 주도세력으로 나설 수 있는 사회적 상황에 힘입어 주체세력으로 나섰고 이들의 희생정신은 숨죽이고 있던 기성세대들까지 일어나도록 만들었다. 정리하자면 학생들이 주체세력으로 나섰던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그 당시 사회상황 때문이었다. 그들은 기성세대들의 모습에 답답함을 느꼈고 스스로 시위현장에 뛰어들었으며 이들의 주도 아래 많은 국민들이 시위행렬을 따랐다. 4.19혁명의 주체가 기성 지식인들이었다면 좀 더 체계적인 시위로 피해를 줄이고 보다 나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는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도 있지만 초창기 학생들의 역할 없이 기성세대들의 시위 참여를 이야기할 수 있는지 한 번 되묻고 싶다. 과연 혁명에서 학생들은 어떠한 역할을 했는가?
4.19혁명이 학생들의 주도아래 이루어졌던 것처럼 혁명에서 학생들은 가장 큰 역할을 해냈다. 위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그들의 희생적인 모습은 기성세대들을 움직였고 각 대학에서는 선언문을 발표함으로써 대학생들을 움직임과 동시에 이승만 독재 정권에 대해 잘 모르고 있던 국민들까지도 혁명에 동조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선언문은 단순히 선언문이기 전에 혁명의 불꽃을 더더욱 타오르게 만들었던 기본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혁명의 선봉에 서서 이승만 정권과 싸웠고 국민들에게 이승만 정권을 부당함을 알리는 역할까지도 수행했다. 분명 그 당시 학생들은 혁명의 일등 공신이었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4.19혁명에서 학생 집단은 그들의 특수한 사회적 위치에서 두려움과 정의감, 그리고 동료의식을 바탕으로 혁명 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들은 죽어있던 기성세대들을 대신해 주체세력으로 혁명의 선봉에 섰고 이승만 독재 정권에 부당함을 국민들에게 알리고자 했다. 45년이 지난 2005년 현재에도 이들의 정신은 국민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남아 있다. 그리고 우리 후대에까지도 혁명의 정신은 영원히 살아 숨쉬고 있을 것이다.
3. 4.19혁명 이후의 학생운동과 현재
☞ 60년 4.19혁명을 통해 이승만 정권은 그 막을 내렸지만 5.16을 통해 박정희가 권력을 잡으면서 한국의 민주주의는 다시 암흑의 길로 빠져들었다. 박정희와 군부세력들은 장기 집권을 위해 민주주의를 희생시켰고 군부세력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모두 무력에 쓰러져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10.26사건이 발생하면서 박정희의 독재 역시 막을 내렸지만 전두환이라는 새로운 신군부 세력이 등장하면서 한국은 다시 군부에 의해 통치되는 비극적인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러한 한국의 정치 현실에 학생들은 분노했다. 그들은 60년 4.19혁명을 통해 이승만을 물러나게 한 선배들의 모습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위와 같은 한국의 정치 현실은 다시 한 번 뒤집어야 할 부당한 것으로 인식되었고 60년 이후 학생운동의 기본 방향은 민주주의를 바로 세우는 것으로 설정되었다. 87년 6월 항쟁에서 승리하고 한국이 민주화의 길을 걷게 되면서 학생운동은 점차 약화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특히 9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학생운동이 시민운동과 같이 통합되면서 어떠한 뚜렷한 이념을 가지기보다는 시민단체의 활동에 따라다니는 수동적인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그렇기에 학생들이 예전처럼 거리로 몰려나와 강력하게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는 모습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고 각 학교들의 총학생회의 모습은 과거와 많이 다른 모습을 띠게 되었다. 물론 과거처럼 학생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시위를 하는 모습이 반드시 좋다는 것은 아니다. 학생들은 분명 어떤 시위나 데모를 위해 존재하는 집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90년 이후에도 한국 정치에는 부당한 일들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많은 일들에 학생들은 그저 소극적으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뿐이었다. 왜 과거와 같이 적극적인 모습으로 학생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지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학생의 한 명으로서 답답함을 느낄 뿐이다. 정리하자면 4.19혁명과 87년 6월 항쟁을 통해 보여졌던 과거의 학생운동과는 달리 현재의 학생운동은 많은 점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과거의 학생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적극적인 시위를 했다면 요즘의 학생들은 정보화 시대에 맞게 인터넷이라는 매체를 이용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또한 인터넷이라는 매체는 불특정 다수와의 새로운 인간관계를 형성함으로써 시민단체의 활동 폭을 넓혀 주었고 인터넷이라는 매체는 촛불시위를 통해 그 위력을 드러냈었다.
시대가 변한 만큼 학생운동 역시 변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부당한 것을 보면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은 시대에 관계없이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지금의 학생운동은 부당한 사실에 대응함에 있어 너무나도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는 거 같다. 폭력적인 시위나 데모만이 적극적인 대응 방법은 아니다. 자신들의 목소리를 학교 안에서만 알리고 분노할 것이 아니라 4.19혁명 당시 학생들의 선언문이 국민들을 일깨운 것처럼 지금의 학생운동도 국민들과 함께 움직일 수 있도록 새로운 변화의 기회를 스스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면 현재의 학생운동은 직접 거리로 뛰쳐나와 시위하던 과거의 학생운동보다 훨씬 더 적극적인 학생운동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4. 4.19혁명을 통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
☞ 우리는 지금까지 4.19혁명에 대해 교과서적으로만 접근하고자 했던 거 같다. 학교에서는 단순히 4.19혁명이 일어나게 된 원인과 진행과정 등을 가르치고 그것을 암기시키는데 주력하고 있으며 이러한 우리의 역사교육 방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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