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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서대문 형무소
1. 민족의 수난처 서대문 형무소
감옥을 말하는 옥(獄)자는 사나운 개 두 마리가 사람의 입을 지키는 모양을 하고 있다. 이는 자유를 구속 하는 형상인 것이다. 따라서 감옥은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속박하고 자유를 박탈하기 때문에 누구나 이를 기피한다. 그러나 인간이 법과 도덕, 종교와 관습이 발달되는 고등사회로 진화하면서 범법자와 반체제, 이단자를 제재하는 재판제도와 이들을 격리하는 감옥제도가 필요하게 되었다. 보편적으로 범죄자를 일반인들과 격리 또는 유폐수용하는 공권력의 행사가 감옥제도이다. 그리고 본원적으로는 지배층이 도전세력을 합법적으로 봉쇄하는 하나의 방법이기도 하다.
일제 강점기동안 조선천지가 감옥이고, 한국인 모두가 죄인 아닌 죄인 취급을 받았지만, 일제는 전국도처에 감옥을 짓고 민족지사, 반일투사 수만 명을 체포하여 형언할 수 없는 고문과 탄압을 일삼고 더러는 일제의 형률에 의해 처형하였다. 또한 수많은 애국지사들을 투옥하여 회유하거나 전향을 강요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혹독한 고문을 함으로 반신불수를 만들어 투옥한 사례도 허다했다.
일제의 조선지배 정책은 가혹한 형벌주의로 시종하였다. 처음부터 국가폭력을 동원한 이래 일선융화 동조동근 내선일체 팔굉일우 황민화 따위를 내세우면서 합병을 시도했으나 일본인으로 동화시킬 수 없었다. 이후 최후방법인 폭력과 형벌로 다스릴 수밖에 없었다.
일제는 한국을 침략하면서 감옥부터 지었다. 초기에는 의병학살에서 보이듯이 현장에서 참혹하게 학살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것으로 반일감정을 더욱 북돋우고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야만성에 대한 비난이 빗발치면서 방향을 바꿔 형식적인나마 재판제도를 실시하고 감옥을 증설하여 지사들을 형벌로 위협하였다. 일제는 수많은 조선의 의병들과 독립 운동가들을 체포하여 서대문형무소등 여러 감옥에 수감하고 그 중에서 많은 지도자를 처형 학살하였다. 국립묘지에 안장된 순국선열 중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한 대표적인 애국지사들은 <표1>과 같다.
일제시대에 수많은 의병들과 항일지사가 서대문형무소에서 고초를 겪었으며, 김구 안창호 선생을 비롯한 애국지사, 그리고 1919년 31운동을 주도한 손병희 한용운 권동진 선생 등 민족대표와 수천 명의 민중이 이 곳에 갇히고, 유관순 열사 김동삼 선생 강우규 의사가 여기서 옥고를 치르거나 생을 마쳤다.
해방이후에는 한때 최남선 등의 거물 친일파들이, 그리고 국회프락치사건으로 항일경력의 국회의원들이 다시 수감되고, 419혁명으로 최인규 등의 자유당 간부가, 516 군사쿠데타 후엔 민주당 정권 각료와 혁신계 반혁명사건 연루자들이 무더기로 수감되었다. 박정희 정권하에서는 반공법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시국사범과 긴급조치 위반으로 수감된 양심수들로 감옥이 초만원을 이루었다.서대문 형무소에는 진보당 당수 조봉암, 315부정선거의 최인규, 정치깡패 이정재, 육영수 여사 저격범 문세광, 박정희 전대통령을 저격한 김재규, 북한 노동당 부부장 황태성, 위장 귀순간첩 이수근이 처형되었으며, 강력범 고재봉 김대두 박철웅 주영형 등도 이곳에서 형이 집행되었다.
2. 서대문 형무소의 역사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에 위치한 서대문형무소(西大門刑務所)는 대한 제국 말에 일제의 강압으로 감옥이 지어져 80여년동안 우리 근, 현대사 격동기의 수난과 민족의 한이 서려있는 역사의 현장이자 우리민족의 항일 독립운동에 대한 일제의 대표적인 탄압기관이었다. 일제는 우리나라를 강제 점령하고, 이 땅을 발판 삼아 대륙으로 침략하려는 야욕을 본격적으로 전개하면서 그들의 침략에 항거하는 수많은 애국지사들을 투옥시키기 위한 감옥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대한제국시대에 자주독립의 상징으로 설립한 독립문 근처에 1907년부터 대규모로 감옥을 지었다.
이 감옥은 일본인의 설계로 그때 화폐 약 5만원을 들여 지었고, 480평 규모의 감방과 80평 정도의 부속시설로 수용인원은 500여명 정도였다. 그때 전국 8개 감옥 총 수용인원이 300여명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대규모의 감옥이었다. 1908년 10월 21일에 경성감옥 (京城監獄)이란 이름으로 문을 연 뒤 일제에게 우리의 국권이 빼앗기자 이에 항거하는 민족독립운동이 전국에서 거세게 일어나고 일제는 수많은 우리의 애국지사들을 체포 투옥시켰다. 수용인원이 증가하자 그들은 마포 공덕동에 또 다른 감옥을 지었고, 이 때문에 1912년 9월 3일에 서대문감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23년 5월 5일에 서대문형무소로 그 이름이 다시 바뀌어 1945년 8월15일 광복을 맞기까지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투옥되어 고문을 받으며 처형되거나 옥사(獄死)당했던 악명 높은 곳이다. 1945년 11월 21일에 서울 형무소로 그 이름이 바뀌고, 1961년 12월 23일에 서울교도소로, 1967년 7월 7일에 서울구치소로 바뀐 뒤 1987년 11월 15일에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옮겨가기까지 이름의 변화만큼이나 많은 민족수난의 역사를 간직한 채 1992년 8월 15일에「서대문 독립공원」으로 개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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