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촉나라 인물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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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나라 인물에 대하여
<유비 현덕>
촉한의 초대황제. 자는 현덕(玄德). 탁군 누상촌에 살았으며 전한 경제의 황자 중산정왕(中山靖王) 유승(劉勝)의 후손. 신장이 팔 척이고 손이 무릎까지, 눈은 능히 자기 귀를 볼 수 있었고 성격은 너그럽고 말은 적었다. 기쁨과 노함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으며 천하의 호걸들과 친교를 잘 맺었다. 탁월한 식견이 있어 사람을 잘 판독하고 또한 용병에도 밝았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신발과 돗자리를 팔아 생계를 잇는 어려운 환경이었으나, 15세 때 노식에게 사사하여 동문 공손찬과 교의를 맺고 호협들과 교류하는 한편, 항상 쌍고검을 차고 다니며, 관우·장비와 도원결의를 맺었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도당을 모아 그 토벌에 참가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며, 그 후 공손찬에게 의탁하여 원소와의 대전에서 공을 세웠다. 196년, 원술로부터의 공격을 물리치고 진동장군 의성정후에 임명되어 조조에게 의탁하고 있었으나, 조조의 살해 계획에 참가했다가 이 계획이 사전에 누설되자 하비로 탈주했다. 원소의 관도대전에서는 원소와 동맹하고, 이에 패하자 형주목 유표에게로 갔다. 이 무렵 삼고지례로 제갈량을 맞아들여 그의 계략으로 형주에서 기반을 구축하던 중, 유표가 죽고 그의 아들 유종이 조조에게 항복하자 조조가 대군을 거느리고 형주를 공격해왔다. 유비는 손권과 동맹하여 적벽대전에서 조조를 대파하고는 형주를 확보하였다. 그러나 형주의 영유문제를 놓고 손권과 대립하여 명장 관우가 죽고 형주는 손권이 영유하게되었다. 유비는 이 사이 한중을 공격하여 한중왕이 되었으며, 220년 조비가 한헌제의 양위로 위의 황제가 되자, 221년 유비도 제위에 올라 한의 정통을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국호를 한 이라 하니, 이른바 삼국의 촉한이다. 다음해 형주의 탈환과 관우의 복수를 위해 오나라를 공격했으나 이릉의 싸움에서 육손에게 대패하여 백제성 영안궁에서 제갈량에게 후주 유선을 부탁한 후 63세로 죽었다. 잘하면 제2의 광무황제(光武皇帝)를 꿈꾸었겠지만, 전편에 가끔 나오듯 정해진 운명은 어쩔 수 없었나? 그가 죽은 뒤 제갈량·강유가 잘 붙잡았건만 아들 대에 결국 망하고 말았다. 시호는 소열황제(昭烈皇帝). 일을 처리함에 있어 인의로 처리한 것이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삼고초려, 비육지탄, 수어지교 등의 고사성어에 관련 있는 삼국지 최고의 카리스마적 인물로 묘사됨.
<관우 운장>
하동 해량현 사람으로, 자는 운장(雲長). 유비와 도원에서 결의한 이래 고난을 같이하였다. 삼국지 연의가 이루어졌을 때는 이미 민간에서 널리 신으로 모셔졌을 때라, 관공이란 칭호로 등장한다. 작자도 전편을 통하여 충의의 화신으로서 주인공을 삼아 그려냈다. 사수관 싸움에서 동탁 수하의 맹장 화웅을 단칼에 베어 용명을 떨친 이래, 계속 삼국 명장으로서의 명성을 지녔다. 한 대 곤경에 빠져 조조를 의지했으나, 끝내는 단기로 오관참장하고 유비 가족을 모셔 의기를 빛냈으며, 뒤에 형주를 차지해 앉아 움직이지 못할 위엄을 보였다. 그러나 지나친 자존심이 화근이 되고 양양을 뺏으려 추병한 사이, 오의 기습을 받아 궁지에 빠진 끝에 죽음을 당하니 건안 24년 10월의 일이요, 향년 59세였다. 자주 영검을 보이어 여몽을 죽이고 아들 관흥을 시켜 원수를 갚게 하는 등, 어디까지나 신격화시켜 그려져 있다. 중국에서는 오래 전부터 재신의로 신봉되어 민간의 신앙이 대단하다.
<장비 익덕>
촉의 무장. 자는 익덕(翼德). 하북성 탁군사람. 유비와는 동향이나, 선대의 고향을 따져 연인 장익덕으로 통하였다. 유비·관우와 도원 결의한 이래로 계속 고난을 같이하여 용명이 무쌍하였다. 유비나 관우가 독서한 사람으로서 상당한 교양을 쌓은 데 비해, 무식하고 졸직 단순한 성격과 인간미로 많은 독자의 공명을 받는다. 술이 과하고 부하에게 혹독하게 대하여 실수가 많았으나, 관우와 더불어 당대 최고의 용장으로 일컬어지며, 특히 형주에 있던 유비가 조조의 대군에 쫓겨 형세가 아주 급박하게 되었을 때 당양 장판 싸움에서 장판교위에서 "내가 장익덕이다."하고 일갈하여 조조군을 물리친 이래 용명이 전국에 떨쳤고, 중년 이후는 전술도 제법 원숙하여졌다. 서촉을 취하러 가는 길에는 엄안을 꾀로 잡아 의로 풀어 주어 귀순시키는 등 큰공을 세워 파서 태수가 되었다. 한중 싸움에서는 와구관에서 술에 묻힌 체 위의 명장 장합을 유인하여 크게 이겼고, 마초와도 좋은 싸움을 벌였다.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거기장군, 사예교위에 임명되었다. 관우가 전사한 뒤로는 거의 광적일 만큼 복수심에 불탔는데, 군사를 움직이려는 전날 밤 수하 장수 손에 싱겁게 목숨을 잃었다(55세). 역시 부하에게 심하게 대했던 보답이었는데, 그의 성미가 어찌나 급했던 지는 항간 속담에 장비 군령이냐?는 문자가 통용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딸은 후주의 황후가 되었다. 오호장군의 한사람으로 시호는 환후(桓侯). 후주 유선의 장인. 벼슬은 거기장군이며 18자나 되는 장팔사모창을 사용.
<조운 자룡>
유비 막하의 용장. 상산 진정사람으로 자는 자룡(자룡). 사람을 대할 때는 부드럽고 의리를 중하게 여겼다. 훌륭한 창법으로 수많은 싸움에서 전공을 세움. 오호장군의 한 사람으로 본디 원소 관할에 있다가 그의 인품에 싫증을 느껴 공손찬을 위기에서 건져주고 그의 막하에 들었다. 거기서 유비와 알게 되고 서로 몹시 흠모하게 되었다. 공손찬이 망한 뒤 오관참장하고 오는 관운장과 유비, 장비를 함께 만나, 그로부터 죽을 때까지 이들과 고락을 같이하였다. 당양파 싸움에서는 단기필마로 유비의 부인인 감부인을 구하고, 미부인이 임종에 맡긴 아두를 품에 안고 적진 중을 돌파하여 용명을 떨쳤다. 유비가 서촉에 출병한 사이 손부인이 아두를 데리고 동오로 가는 뱃길을 따라가, 이때 역시 아두를 도로 찾아 돌아왔다. 214년에는 성도 공격의 일익을 담당하여 출진 했고, 219년에는 한중공방전에서 정찰도중 위의 주력 부대를 만났으나 뛰어난 전술로 후퇴에 성공하여 찬탄을 받았고 한중에서 황충을 구해냈다. 유비가 관우의 원수를 갚고자 출병하였을 때도, 반대를 무릅쓰고 강주 수비에 나서 용감히 싸워 패군 한 유비를 도왔으며, 228년, 유비가 죽은 후 제갈량이 위를 치고자 기산에 출전하였을 때는, 나이 이미 칠십을 넘었건만 참오장이 되어 등지와 함께 양동작전으로 기곡에 진주했다가 조조의 대군을 만나 소수의 군대로 잘 싸우고 적장 한덕의 5부자, 다섯 장수를 혼자서 싸워 죽여 용맹이 쇠하지 않음을 보였다. 제갈량이 재차 위를 치기에 앞서 세상을 떠났다. 일생을 전진 중에 달리면서 번번이 그만큼 큰공을 세우고도 와석종신하였음은 진실로 복장이라 하겠다. 일의 처리에 있어 실수가 없이 거의 완전무결하게 처리한 둘도 없는 충신. 아들에 조통, 조광이 있어 촉한에 벼슬하였으나 크게 드러나지 않았다.
<마초 맹기>
촉의 장군. 서량태수 마등의 큰아들. 무릉 사람. 자는 맹기(孟起). 얼굴은 분을 바른 듯이 희고 늘씬한 키에 허리는 가늘고 어깨통이 넓어 비단 마초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무용은 절륜했으나 성질이 사납고 지모가 모자랐다. 아버지가 조조에게 속아 패하여 죽자, 양주에 근거하여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기동력 있는 기마대를 소유하여 211년, 한수와 함께 장안을 뺏고 동관을 떨구어 용명을 날렸다. 적벽대전에서 패해 서쪽으로 온 조조군과 동관에서 싸움에서는 허저와는 백여 합을 싸워 승부 나지 않았으며 조조를 추격하여 붙잡을 뻔 도 하였으나 경륜이 모자란 때문에, 친삼촌같이 여겨오던 한수를 조조의 반간을 받고 의심하여 죽이려다, 이루지 못하고, 방덕, 마대만을 데리고 도망하여 농서의 임조를 향해 갔다. 오랑캐 땅에서 힘을 길러 2년만에 다시 재기해 왔으나, 하후연의 대군에게 패하여 또다시 방덕·마대만을 데리고 한중으로 장로를 의지해 갔다. 그리고 거기서 가맹관을 지키던 장비와 마주쳐 수백 싸워 또다시 용명을 떨쳤으며, 그를 아낀 제갈량이 뒤로 장로의 모사 양송을 매수하여 난처한 입장에 세우고 이회가 항복을 권하는 바람에 마침내 성도를 포위한 유비군에게 항복했다. 마초가 항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 용맹을 무서워하던 성도성내가 동요되어 10일도 되지 전에 성을 내주었다고 한다. 이때 형주를 수비하고 있던 관우가 그가 어떤 인물인지 가르쳐 달라고 제갈량에게 편지를 보내자 제갈량은 마초를 장비와 겨룰 만한 용장이라고 칭찬했다. 소위 오호대장(五虎大將)의 한 사람으로 극진히 대우받았으나 제갈량이 위를 치기에 앞서 서평관을 지키다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위후(威侯)
<황충 한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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