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대여大餘김춘수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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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대여(大餘) 김춘수
♠ 생애 및 작품 활동
김춘수는 1922년 11월 25일 경남 통영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김춘수는 충무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세상 물정을 모르고 자라난 귀공자였다. 그의 유년기 시절은 자전적인 그의 작품 <처용>에 비교적 자세히 소개되고 있는 편이다. 그러한 그의 생활이 장년이나 노년이 된 이후에도 그를 현실에서 좀 떨어진 고고한 위치에 서 있게 하는지도 모른다. 그는 또한 양복 윗도리를 매일 갈아입는 멋쟁이였으며, 미식가였고, 사람을 사귐에 있어서도 선별적으로 사귈 만큼 성격에 융통성이 있는 편은 아니었다. 집안에서 그는 전기 휴즈도 하나 갈아끼우지 못하는 사람이었고 교수로 재직하던 시절에도 7,8년 동안 사진 한 장 찍어보지 못할 만큼 세상살이에는 무관했으며 심지어 카메라의 셔터가 어느 것인지도 모르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 통영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기중학에 입학했으나 중퇴하고 일본 니혼대학 예술대학 창작과에 입학했다. 1942년 일본 천황과 총독 정치를 비방했다는 혐의로 퇴학당하고 6개월간 유치되었다가 서울로 송치되었다. 통영중학과 마산고등학교 교사를 거쳐(1946-1952) 마산대학과 경북대, 영남대 교수를 지냈으며(1960-1981),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국회의원을 역임 일제시대로부터 순수문학을 부르짖어온 시인 김춘수, 소설가 김동리, 문학평론가 조연현,수필가 조경희 등이 앞다투어 군부독재정권을 미화하는 글을 남겼다. 그 결과, 김춘수는 11대 민정당 전국구 국회의원을 지냈고, 조경희는 한국문화예술단체총연합회(예총) 회장과 예술의 전당 이사장을 거쳐 1988년 노태우 정권 아래서 정무 제2장관에 올랐다.
했고, 이후 방송심의위원회 위원장 및 한국시인협회 회장 등을 지냈다.
시작 활동으로는 1945년 통영문화협회(유치환, 윤이상, 전혁림, 김상옥 등)를 결성하면서 문화 계몽 운동을 하는 한편 본격적인 시 창작을 시작하였으며, 동인지 『로만파』(조향, 김수돈,1946),『시연구』(유치환, 김현승, 송욱, 고석규, 1956)를 발간한 바 있다. 시인은 초기에는 유치환, 서정주, 청록파의 시에 영향을 받았으며 30세가 넘어 비로소 자신의 시를 쓰게 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1981년부터 예술원 회원으로 활동했으며 자유아세아문학상, 경남경북문화상, 예술원상, 대한민국문학상, 은관문화훈장, 인촌상, 대산문학상, 청마문학상 등을 받았다. 2004년 8월 기도폐색으로 쓰러져 투병생활을 하다 2004년 11월 29일 82세로 타계했다. 주요저서로는 『구름과 장미(1948년)/ 늪(1950)/ 기(1951)/ 인인(隣人)(1953)/ 꽃의 소묘(1959)/ 부다페스트의 소녀의 죽음(1959)/ 타령조기타(1969)/처용(1974)/김춘수시선(1976)/ 남천(1977)/ 비에 젖은 달(1980)/ 김춘수전집(1982)/ 처용이후(1982)/ 김춘수시집(1986)/ 꽃을 위한 서시(1987)/ 너를 향하여 나는(1988)』등이 있다.
1. 서론
흔히 김춘수 시인을 ‘인식의 시인’, ‘이미지의 시인’이라 부르는데 그 이유는 그의 시 표현 형식과 창작 방법 때문이다. 김춘수 시의 변천사를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첫째 시기에는 존재의 추구, 존재와 언어의 관계에 대한 탐구 즉 이미지보다는 관념이 중심이 되던 시기이다. 둘째 시기에는 시에서 관념, 사상, 철학을 빼는 작업을 시작한다. 이미지를 위한 이미지, 즉 이미지를 어떤 관념의 수단으로도 사용하지 않는 순수한 이미지의 세계를 탐구한다. 시속에서 기존의 관념을 배제한다는 뜻으로 ‘무의미 시’라 불리게 된다. 셋째 시기에는 이미지가 아무리 순수하게 서술적으로 쓰인다 해도 이미지는 늘 의미, 즉 관념의 그림자를 거느리게 된다는 시인의 생각에 따라 이미지도 없애야겠다는 극단적인 시도를 하게 된다. 그 결과 이미지는 없어지고 리듬만 남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무의미 시를 지나 아름다운 상상의 나래를 접고 지난 날을 돌이켜 보는 회억의 산문시를 쓰게 된 것으로 보인다.
2. 본론
1) 김춘수의 초기 시(의미시)
초기시는 사실 릴케의 초기시에 많은 영향을 입고 있다. 릴케와 관련된 평론 <릴케와 천사>, <릴케적 실존> 등을 발표하기도 했으며 97년에는 자전소설 <꽃과 여우>를 간행했다. 또한 김춘수는 이런 영향 속에서 시 쓰기를 출발하지만, 우리 시의 역사에서는 특이한 시세계를 발전시킨다. 특이하다는 것은 그의 시세계가 한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끊임없는 지적 모험을 전개하기 때문이다. 김춘수는 사물의 사물성을 집요하게 탐구했다. 모든 것이 인식의 대상으로서의 사물이고, 그의 언어는 인식을 위한 연장이다. 그가 인식의 시인으로 일컬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초기의 의미시를 대표하고 있는 작품으로는 [꽃] [꽃을 위한 序詩] [나목과 시] 같은 작품들을 중심으로 요약된다. 이 시기의 시에서 읽을 수 있는 두드러진 특성으로는 이른바 존재에의 탐구를 들 수 있다. 이 시기의 대표작은 [꽃]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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