舊 소련 및 중국의 對 북한 정책에 대한 지정학적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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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관계의 기본구조는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초강대국을 중심으로 하는 냉전체제에 기반을 두었다. 이 가운데 특히 미국은 제2차 대전을 통하여 확보된 막대한 생산력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국제정치를 좌우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소련 역시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국력의 팽창을 도모하기 시작하였고, 대전 후에는 미국과 패권을 다투는 초강대국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전후 30년 동안 지속된 냉전적 양극체제는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성립되었고, 동북아지역 정세 또한 이러한 미국과 소련중심의 대립구도에서 전개되었다.
1945년 2월 얄타회담 이후 미국과 소련 중심의 양극체제는 세계정치경제구도를 지배하였다.
소련은 동유럽에서의 세력팽창을 획책하였고, 동북아지역에서도 미국주도의 세계질서에 대항하기 위한 팽창정책(expansion policy)을 취하게 시작하였다. 미국은 군비를 확충하여 소련이 주도하는 공산권의 팽창을 봉쇄하려는 전략을 발전시켰는데 이것이 곧 미국의 봉쇄정책(containment policy)이다. 이처럼 1950년대에 소련이 미국주도의 세계질서에 도전하면서 세계질서는 미국과 소련중심의 냉전체제로 돌입하게 되었다.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은 이러한 갈등구조의 대표적인 표본이었다.
냉전시기의 동북아 정세에서 전후 미국의 정책이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는 유럽에서의 정책과 비교하면 좋은 대조를 이룬다. 트루먼선언, 마샬계획, 베를린봉쇄, 북대서양조약기구결성 등의 유럽우선주의(Europe First Policy)와 비교할 때 전후 초기 미국의 동북아 정책은 상당히 냉담하게 다루어졌다.
미국의 동북아 정책이 아직 확고한 방향을 정립하지 않은 상태에서 1950년 6월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였다. 한국전쟁에 대한 미국의 태도는 소극적인 동북아 정책이 적극적으로 전환되었음을 의미하는 신호탄이었다.
1950년 10월 중국 인민해방군의 한국전쟁 참전은 서방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이는 동북아에서 냉전구조가 더욱 고착화하는 결정적이 계기가 되었다.(오수열 1992:72-78)
이시기에 동북아 주요 문제 중 하나는 타이완해협을 둘러싼 중미관계의 긴장이었다. 미국은 타이완의 국민당정권의 본토 공격을 억제하지 않고 방임하였으며 이는 한국전쟁이 이미 교착상태에 빠졌고, 전쟁의 장기화가 중국에 결코 유익하지 않음을 암시하기 위한 의도였다. 이러한 대중 강경책은 1954년 대중봉쇄를 목적으로 한 동남아조약기구(SEATO)가 창설되고, 같은 해 12월 2일 중국의 위협으로부터 타이완의 보호를 규정한 ‘미국-타이완 상호방위 조약이’이 체결됨으로써 최고조에 달한다.
1950년 초반까지 지속되던 중국과 소련의 우호관계는 스탈린의 죽음이후 후르시초프가 새로운 권력자로 나타나게 되면서 변화를 맞게 된다. 후르시초프는 이전까지와는 다른 외교정책노선을 표함으로써 외적으로는 우호관계를 지속하지만 미묘한 갈등과 대립이 내재되게 된다.
소련은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경계하여 핵무기 관련 기술, 원료 공여에 대해서 비호의적인 태도를 취하였고, 타이완 문제해결에 관해서도 미국이 의도하는 방식에 동의할수있음을 시사하여 중국과의 대립이 점점 격화되게 된다. 소련은 1960년 중국에 체류하던 1,300여명의 경제, 군사고문을 소환함과 동시에 수백 건에 달하던 기술원조협정 및 협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해 버렸다.
1962 년에는 소련의 쿠바미사일기지문제에서 소련의 미국에 대한 굴복은 중소대립을 더욱 첨예화시키는 작용을 했다. 뿐만 아니라 같은 해 10월 중국-인도 국경분쟁에서 소련이 중국을 비난하고 인도에 군사원조를 제공하면서부터 사회주의 형제국으로 불리었던 양국관계는 회복이 불가능한 선까지 도달했다고 보기에 충분했다. 결국 1964년 중국은 핵실험에 성공하고 이를 억제하려고 노력했던 소련의 기도는 실패하게 되었고, 이에 양국의 마찰과 분쟁은 실제적 단계로 진입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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