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으로 복원해 본 가야의 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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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앞에서 발표한 ‘문헌으로 본 가야의 건국’에서는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신뢰하는 가운데, 가락국기에 명기된 서기 42년을 가야의 건국연대로 보고 있다. 따라서 이를 토대로 고고학적으로 가야의 건국연대와 건국세력, 그리고 어떤 문화적사회적 토대에서 가야가 건국되었는지 고찰하고자 한다.
Ⅰ. 가야지역의 역사적 변동
1. 청동기시대의 소군장국가
경상도 각지에서 각 단계의 청동기유물이 다수 출토되고 있는데, 그 편년이 기원전 4 ~ 3세기 이전에 속하는 청동기유물도 존재하나, 대부분의 유물들은 기원전 2세기 ~ 기원전후의 유물로 편년된다. 이것은 최소한 기원전 2세기경에는 낙동강유역 및 경남 남해안 각지에 청동기를 소유하거나 부장할 수 있는 지배권력과 이를 토대로 하는 다수의 소규모 세력집단들 거대한 지석묘를 축조할 수 있는 소군장세력으로서, 후에는 이들 사이에 우열의 차이가 나타나서 일부지역에서는 서북한지역의 청동기를 소량이나마 구입하여 쓰기도 했다.(창원 잔동리, 김해 무계리, 내동 지석묘 등지에서 출토된 청동유물)
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위만조선계유민과 문화 또는 북방계 청동기문화의 유입이 정치문화적으로 적극적인 전환의 계기를 가져오는 경주, 대구, 영천 등지와는 달리, 경남의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청동기문화단계의 소규모 단위집단들을 통합하면서 진변한의 소국들을 성립시키게 되는 뚜렷한 정치문화적인 계기를 설명할 수 있는 고고학자료는 그 성과가 미비한 상태이다.
경남 변진 소국의 중심지로 비정되는 지역 彌離彌凍國-밀양군, 接塗國-칠원(함안군에 병합), 古資彌凍國-경남 고성군, *奚國-경남 위산군, 樂奴國-경남 하동군 구양면 일대, 軍彌國-사천군 곤명곤양 양면부근(?), 狗邪國-김해군 일대, 安邪國-함안군, 瀆盧國-동래군(경남지역에 한하여 명시했다. 이밖에 경북지역 11국, 위치가 미상인 6국이 있다.『한국고대사연구』p.274~276 참조)
에서는 공통적으로 지석묘 지석묘의 성격에 대해서는, 이를 신분적인 계층구분이 미약한 평등사회의 일반구성원들의 무덤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이미 신분적인 계층구분이 존재하는 불평등사회의 지배자의 무덤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대체로 많은 연구자들은 그 중간적 입장에 서며, 특히 지석묘 중에서 거석을 사용한 대형의 것이나 후기의 것은 계급사회 지배층의 무덤이라고 보고 있다.
, 청동기 유물, 초기철기시대 패총유적들이 분포, 발견되고 있다. 안춘배, 「가야지역 선사문화의 변천」『한국고고학보』12, 1982. (부산 경남지방 선사유적 및 유물 분석표 참조. p.104~128)
그리고 이들 지역에서는 기원전 3 ~ 2세기 이전부터 경주대구지역과는 달리 지석묘계 토착집단들을 주축으로 다수의 소규모 정치집단들이 이미 성립되어 있었다. 창원군 진동면 진동리유적, 김해군 장유면 무계리 지석묘, 김해시 내동 지석묘 등
그러나 기원전 3세기 말 ~ 2세기 이후가 되면 기존의 지석묘, 석관묘계과는 다른 새로운 묘제인 옹관묘계 집단들이 대두되고, 청동기의 수량과 종류도 다소 증대되는 현상을 보인다. 김해시 회현리패총 D구 대지 등의 옹관묘
옹관묘라는 새로운 묘제를 가진 사람들이 언제 이 지역에 유입되기 시작한지는 알 수 없으나, 결과적으로 지석묘목관묘를 주묘제로 하던 이 지역에 옹관이라는 새로운 묘제를 지닌 집단이 이주, 정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청동기를 부장하는 묘제가 옹관이라는 것과 부장된 청동기의 수량이 월등하다는 것을 감안할 때, 기원전 2세기경 이 지역의 주도적인 지배집단, 즉 다수의 지석묘석관묘계 주민집단을 통솔할 수 있었던 하나의 세력집단으로서의 옹관묘계 주민의 존재를 알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우월한 세력은 김해지역을 중심으로 각각 개별적인 세력으로 성장하고 있었을 것이라 추정된다.
2. 초기철기시대의 변한 구야국(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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