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고고학과 고구려의 유물 및 유적 과고 분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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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고구려 국가는 압록강 중류의 독로강 및 혼강유역을 중심으로 성장 하였다. 이 지역의 지리적 환경은 깊은 계곡과 산이 많고, 하천을 따라서 좁은 평야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래서 초기부터 농경이 주요 산업이었으며 가축 사육도 발달하였고 사냥이나 물고기 잡이도 중요한 생산 기반이었다.
그리고 이 지역은 교통로의 중심지로서 동쪽으로는 동해안으로 나아갈 수 있고, 서쪽으로는 요동 방면으로 진출하며 북쪽으로는 송화강 유역으로 연결되고, 남쪽으로는 한반도의 서북부 일대로 진출할 수 있는 요충지이기도 하다.
이러한 자연 지리적 환경 아래서 기원전 3세기 무렵부터 이 지역에 철기문화가 보급되면서 곳곳에서 소규모 정치집단이 등장하였다. B. C128년 경에는 주변의 강력한 국가인 고조선에 불만을 품고 예군 남녀라는 인물이 28만여 인(人)을 거느리고 한에 투항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 28만 인의 집단은 하나의 강력한 결집력을 갖는 국가라기보다는 각 지역 정치집단들이 완만한 형태로 결합한 연맹체 수준이었다.
그런데 한나라가 고조선을 침략하면서 기원전 107년에 고구려 지역에도 현도군이 설치되었다. 현도군에 소속된 3개의 현 중에 우두머리 현으로 고구려 현이 설치되었음을 보면, 기원전 1세기 무렵에 이미 ‘고구려’란 이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건국기년에 대해서는 고구려 멸망기 이래 여러 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는 700여 년 존속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그 외에 800년 설이나 900여년 설도 전해지고 있다. 실제로 주몽 이전에 ‘고구려’라고 불리우며 주변 세력과 구분되는 정치적·문화적 기반이 압록강 중류지역에 형성되어 있었으니 그 역사적 연원은 충분히 올라갈 수 있겠다.
물론 이때에 고구려라는 국가가 성립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아직은 각 지역에서 정치집단이 성립하고, 이들이 점차 소국으로 성장해 가고 있는 과정이었다. 그런데 이 지역 토착 세력인 고구려인은 현도군에 대해 강력하게 저항하였다. 그 결과 현도군은 점차 요동 지역으로 중심지를 옮겨가지 않을 수 없었다.
기원전 75년 무렵 현도군을 몰아낸 뒤 여러 소국들은 고구려왕을 대표로는 연맹체 국가를 형성하였다. 중국 기록인 「삼국지」고구려 전에 의하면 초기 고구려 연맹장의 지위는 소노부가 장악하였으나, 그 뒤에 계루부에게 넘겨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 실려 있는 고구려의 건국설화에 주몽이 부여에서 남쪽으로 내려와서 압록강 유역의 토착세력인 송양왕 집단을 누르고 나라를 세운 것으로 전하고 있다. 즉 부여계 유목민인 주몽으로 대표되는 세력집단이 바로 계루부로서, 이들 주몽집단이 한 군현과 투쟁하는데에서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며 고구려 연맹체의 주도권을 차지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는 1세기 태조왕 대에 이르러 고구려족 전체를 통솔하는 보다 강력한 국가로 발전하였다.
이 때 고구려왕은 고구려족을 5부로 나누어 통솔하였다. 초기 고구려를 구성한 5부의 이름은 「삼국지」에 의하면 계루부· 소노부· 절노부·관노부· 환나부등 4부의 이름을 전하고 있다. 이름은 서로 다르지만 왕실을 구성한 계루부를 제외하면 소노부=관나부, 순노부=환나부 등으로 대응하고 있다. 이들 명칭속의 ‘노’나 ‘나’는 강이나 냇가의 평야 또는 그러한 지역의 세력집단을 뜻하는 말로서, 처음에 압록강 유역의 각 지역에서 여러 나부로 편제된 것이다.
이들 5부 중에서도 왕실을 구성하는 계루부와 왕비를 배출하는 절노부, 그리고 이전에 연맹장의 지위에 있었던 소노부의 3부가 세력이 강대하였으며, 관노부와 순노부는 상대적으로 세력이 약하였다. 5부는 각자 부내부의 일에서는 자치권을 인정받고 있었으나, 대외적인 무역권 · 외교권은 고구려왕이 직접 관장하였다. 그리하여 고구려왕은 현도군과의 경계에 책구루라는 교역 지점을 설치하여 이곳을 통하여 현도군과의 교섭 창구를 일원화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중국 군현이 고구려의 여러 정치집단에 대해 분열과 회유를 시도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이들 5나부를 다스리는 고구려의 지배 세력가를 가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가’는 우두머리라는 의미로서 ‘간’·‘한’과 서로 뜻이 통한다. 세력의 크기에 따라 대가·소가로 나뉘는데. 이들은 수천에서 수백에 이르는 가호를 지배하였다. 가의 지배 아래에는 호민과 하호가 있었다. 호민은 읍락의 지배층이었다. 「삼국지」고구려 전에는 “나라 안의 대가는 농사를 짓지 않고, 좌식자가 1만여 인이다. 하호가 식량과 고기와 소금을 날아와 공급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대가와 좌식자가 곧 고구려 지배층이었다. 하호는 피지배층으로 이들에게 예속된 존재들이었다. 그런데 고구려왕의 권력은 점차 커져서 각 부의 독립성은 그만큼 축소되었고, 고구려왕의 통솔력이 상당한 정도로 강화되어 갔다. 고구려 초기의 정치 정세는 왕권의 집권력과 가세력의 자치력이 서로 대립하고 갈등하는 관계에 의해 규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5. 참고문헌
- 전호태, 2000;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 서울: 사계절
- 김영진, 2003; 고구려 유물편, 서울: 백산자료원
- 민영, 2004; 고구려 이야기, 서울: 창비
- 전호태, 2007; 고구려 고분벽화 이야기, 경기도: 사계절
- 동북아역사재단 편, 2007; 다시보는 고구려사, 서울: 동북아역사재단
- 전호태, 2008; 고구려 고분벽화 읽기, 서울: 서울대학교 출판부
- 동북아역사재단 편, 2008; 일본 소재 고구려 유물, 서울: 동북아역사재단
- 기획편집위원회 편, 2009; 고구려 유적의 어제와 오늘1, 서울: 동북아역사재단
- 기획편집위원회 편, 2009; 고구려 유적의 어제와 오늘2, 서울: 동북아역사재단
-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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