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고분미술 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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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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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는 문헌상으로는 그 개시가 기원전 1세기로 올라가지만, 실제로 명실상부한 왕국으로서 면모를 갖춘 것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4세기 경 부터다. 그 이전의 약 3세기는 원삼국시대(0-300년경)로서 원사(原史)시대로 들어가는데 이 시기의 작품은 토기 이외에는 유적조사가 덜 된 탓인지 거의 없다시피 하다. 따라서 미술사에서 말하는 삼국시대는 큰 봉토분(封土墳)이 건설되던 소위 고분시대(4-7세기 전반)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는 지리적으로 3국으로 갈라져 각각 개성 있는 미술을 발전시켰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모두 중국의 육조 미술의 영향을 받았으며, 불교미술상으로는 범극동 양식이라고 할 수 있는 공동분모 위에 있었기 때문에 삼국이라는 한 시대구분으로 일괄할 수 있다. 신라의 통일 기는 7세기 후반부터 10세기 전반까지의 3세기다. 10세기는 역사상으로 고려지만 신라양식의 계승이 당연히 추측된다. 10세기는 말하자면 신라 같기도 하고 고려 같기도 한 과도기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미술품의 정확한 시대판정이 곤란한 나머지 나말 · 여초라고 적당히 얼버무리는 시기가 10세기 인데, 자세히 고찰하면 10세기 전반과 후반은 식별 할 수 있을 정도로 차이가 날 것으로 믿어진다. 아직 그러한 자료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하였고 연구도 불충분하지만, 장차 그러한 자신 있는 시대구분이 이루어 질 것으로 믿는다.
신 라
시대 개관
신라는 초기에는 삼국 중에서 제일 작은 나라였지만 6세기 지증왕과 법흥왕을 거치면서 진흥왕 때에 이르러 국위나 영토의 측면에서 절정을 이루었고 또한 강한 정신력으로 국가를 굳건하게 키웠으며 드디어는 삼국을 통일하는 데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이 시대의 신라를 삼국시대 신라 또는 고신라라고 부르며 통일을 이룬 이후의 신라는 물론 통일신라라 한다. 강인한 정신력을 바탕으로 비단 영토만이 아니라 신라 고유의 미술문화도 전통을 이어서 발전시켰으며, 법흥왕 때인 6세기(527)나 되어서야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하여 공식적으로 뒤늦게 받아들인 불교와 미술문화도 높은 수준으로 꽃피웠다. 고구려나 백제와는 달리 수도를 전혀 옮기지 않고 경주에 뿌리를 내린 채 삼국시대는 물론 통일신라가 무너질 때까지 1000년 동안 고수한 것도 특기할 만한 일이다.
회화와 서예
신라는 회화를 전담한 것으로 추정되는 기구인 채전(彩典)을 세워 국가적 필요성에 따른 회화의 수요에 대응하였다. 통일 신라 시대에는 이 기관의 이름이 전채서(典彩署)로 바뀌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기구의 존재로 보아 회화가 활발하게 제작되었었다고 믿어진다. 신라의 화가들과 회화도 일본에 영향을 미쳤던 듯 그곳에서 활약했던 화사씨족인 수하타도에시는 신라계로 믿어진다.
신라의 화적(畵蹟)으로는 경상북도 순흥에서 발견된 어숙술간묘와 기미년명 순흥 읍내리 벽화고분 2기의 벽화와 천마총 등 고분에서 나온 채화유물 들이 있다. 순흥의 벽화고분들은 평지에 축조된 경주지역의 고분들과는 달리 산등성이에 있고 벽화가 그려져 있어 특이하다. 벽화의 내용으로 보아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판단된다. (연화문사진)
어숙술간묘의 석비에는 인물이 그려져 있으나 훼손이 심하여 분명한 모습을 파악하기 어렵고 오직 묘실 천장에 그려진 만개한 연꽃만 비교적 뚜렷하게 확인된다. 천장에 활짝 핀 연꽃 한 송이를 그리는 경향은 고구려 중기의 고분에서 전형적으로 볼 수 있어 연관성을 짐작케 한다.
<연화문>, 475년(또는 535년),
경상북도 순흥면 태장리
어숙술간묘 천장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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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 고분미술 2 (신라 · 가야) - 이영훈 · 신광섭 지음
· 한국미술의 역사 - 안휘준 · 김원용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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