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치의 발전과정과 헌법 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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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일제의 식민지로부터 광복되었으나 미. 소에 의해서 국토가 분단되어 남한은 미군에 의해 3년 동안 군정이 실시되었다. 분단은 고착되었고 1948년 5월 10일 헌법 제정을 위한 총선거가 실시되어 1948년 7월 17일 국회 간접 선거의 대통령제, 단원제 국회 등을 골자로 하는 제헌 헌법이 공포되었고, 같은 해 8월 15일 대한 민국이 수립되었다.
군정하(軍政下)의 정당(政黨)- 우리나라의 좌우익의 대립과 국제적 흐름에 영 향을 받아 분단이 고착화되는 과정에 중심
1945년 8월15일 해방과 더불어 우리나라엔 많은 정당이 우후죽순처럼 탄생하였다.
한국을 식민지화하고 무단정치로 일관해 오든 그들이 제 2세계대전의 종말과 함께 무조건항복에 앞서 1945년 8월9일 조선총독과 정무총감이 항복후의 치안유지와 일본인의 생명재산에 대한 보호책을 송진우(宋鎭禹)에게 위임시키고자 하였으나 송진우는 한국에 연합군이 진주하면 일본군은 무장을 해제하고 한국은 임시정부가 들어와 정권을 담당하여야 한다고 이를 거부하자 그들은 8월15일 오전중에 여운형(呂運亨)에게 동일한 내용을 요청한 결과 그가 수락함으로 일본인들은 그이 요구를 들어주게 되고 여운형은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를 조직하기로 하고 그가 1944년 8월 14일 이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조성하였던 비밀결사인 조선건국동맹(朝鮮建國同盟)을 모체로 하여 그해 8월 17일에 그 조직을 완료하고 8월말까지 전국적인 조직망을 장악하면서 9월 3일에는 중앙위원131명으로 확대시키는 등 전국적인 정부형태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각도 군면에 이르기까지 치안대를 조직하는 등 이어 인민위원회를 면단위까지 조직하여 실질적인 행정에까지 임하기로 하였으나 건국준비위원회내의 좌익계와 안재홍일파의 권력싸움에서 안재홍등의 탈퇴로 자연 좌경화하기에 이르렀고 건국준비위원회는 좌익계 세력만을 규합하여 조선인민공화국(朝鮮人民共和國)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성할때부터 그 인맥의 허술함과 무모함을 힐책해오던 민족진영의 김병로(金炳魯) 백관수(白寬洙) 조병옥(調炳玉)등 민족주의자들은 이미 조직을 본 원세훈(元世勳) 중심의 고려민주당(高慮民主黨)과 단합하여 8월 28일에 조선민족당(朝鮮民族黨)을 조직하기 위한 발지 총회가 결성되었으며 한편 백남훈(白南薰) 윤보선(尹潽善)등은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조직하였다. 이처럼 민족진영의 일익을 담당하던 제정당과 정파는 9월 6일 여운형 중심세력이 인민공화국 선포에 이르르자 그 부당성을 폭로하고 이를 타도하기 위하여 9월 16일 1,600명의 당원이 모인 가운데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 창당총회를 천도교기념관에서 갖게 되었다.
또한 건준(建準)을 탈퇴하고 중간우파를 지행하는 안재홍(安在鴻)은 당시의 공화당등 군소정당을 흡수하고 9월 2일에 국민당(國民黨)을 발족시켰다.
이와같은 좌우익정당의 치열한 투쟁과 군소정당의 등장으로 한국의 정국은 그 진로가 분간하기 어려운 지점에 이르렀을 때 1945년 9월 9일 미군의 인천 상륙과 함께 표고 1호로써 38선 이남의 일절 행정권이 군정하에 속한다는 표고문과 함께 금조된 조선인민공화국은 물론 법통있는 임시정부까지도 인정을 받지 못하게 되자 여운형세력은 고려국민동맹(高慮國民同盟)등 군소정당을 합하여 조선인민당(朝鮮人民黨)을 발당하고 1925년 4월에 조직되어 그동안 지하에 잇던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도 9월 12일에 재결성되었다. 그래서 한국의 정국은 좌우익의 치열한 정당싸움이 벌어져갔다. 이어 공산당은 남조선노동당(南朝鮮勞動黨)을 1946년 11월 23일에 발족시키고 선동과 파괴를 계속하였다.
중국에서 활동하던 임시정부도 그 1진이 1945년 11월 23일에 제 2 진은 12월 1일에 환국하였으며 미국에서 활동하던 이승만박사(李承晩博士)도 1945년 10월 16일에 환국하여 정치무대는 더욱 넓어져 갔다. 정당간의 이념투쟁보다 현실적인 권력구조의 쟁취에 더욱 심요했던 정당간의 구조는 국민의 앞날에 암운을 던져주었으며 오랫만에 얻은 독립국가로서의 진고가 더욱 암당할 때 12월 27일을 기해서 모스크바에서 열린 삼상회담에서는 한국에 신탁통치가 결정되었다는 보도와 함께 정당간의 더욱 긴장을 고조시켰다. 이와같이 결정에 뒤이어 국내 정당에서는 12월 29일에 신탁통치반대투쟁위원회가 결성되고 12월 31일에는 전국적으로 신탁통치반대 시윈가 전개되었다. 그러나 돌연 좌익에서는 종래의 태도를 바꾸고 신탁통치 지지의 운동으로 변경됨에 따라 좌우익은 정면으로 대립하게 되었으며 민족진영에서는 신탁통치 반대에 민족진영의 대동단결을 촉구하면서 1946년 2월 8일에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가 조직되고 공산당을 비롯한 좌익단체들은 1946년 2월 15일에는 결성을 보게됨으로써 좌우정당의 거리는 더욱 벌어지게 되었다. 신탁통치 반대의 운동은 국민의 호응속에 전국에 번져갔다. 서천군에서도 서천 장항 한산 판교 비인에 대대적인 신탁통치 반대의 시위가 있었으며 유림을 비롯한 각계인사들이 이에 호응하였다.
한국의 정국은 좌우익의 극렬한 투쟁속에 휩싸였을 때 미 군정당국은 1947년 2월5일에 한국인 민정장관으로 안재홍(安在鴻)을 취임시키고 1947년 6월 3일에는 종래의 군정청을 남조선과도정부(南朝鮮過渡政府)라 개칭하고 행정권을 이양했다. 그리고 1947년 5월21일에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되었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결국은 통일문제가 유엔총회에 이관되어 한국총선거 실시를 결의하였으나 북한측 선거를 소련 측 거부로 남한에서라도 총선거를 실시하자는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특히 이승만 박사를 중심으로 한 대한독립촉성국민회와 172개의 정당 단체로 구성된 중앙협의회는 민족진영의 여러 단체가 적극 지지하는 가운데 유엔총회 결의에 의하여 남한 단독선거의 실시를 결의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 주석 김구(金九)가 이끄는 일부 민족진영 즉 한독당(韓獨黨)과 민족자주연맹(民族自主聯盟)을 비롯한 수개단체에서 남북한 정치회담을 제기하고 나서고 김구 김규식 조소앙 조완구 등이 북쪽에 가서 4일간 즉 1948년 4월 19일부터 회담에 임하였으나 그들의 일방적인 행동에 이용만 당한 셈이 되었다.
그후 남한에서는 1948년 5월10일에 선거가 실시되어 전국 13,000여개의 투표소에서95.5%가 투표에 참가하여 자유분위기 속에서 선거가 이루워졌으며 선거에 임한 통계는 무소속이 417명 대한독립촉성국민회가 235명 한국민주당91명 대등청년단87명 기타45개 정당 사회단체에서 118명이 입후보하여 선거결과 무소속이 85명 대한독립총성회가 55명 한국민주당29명 대동청년단12명기타 정다 사회단체에서 19명이 당선되어 역사적인 개헌국회가 이룩해졌다. 서천군에서는 무소속으로 이훈구박사(李勳求博士)가 당선되어 제헌 의원이 되었다.
제1공화국
이 승만이 초대 대통령이 되어 정부를 구성함으로써 제1공화국이 시작되었다. 서구에서 도입된 민주 정치 제도와 전통적인 정치 문화의 불일치는 정치적 갈등을 야기시키고 민주 정치 발전을 왜곡시켰다. 또한, 국제적 냉전 체제의 고착으로 민족 간의 이념 갈등은 심화되었고 이는 한국 전쟁을 야기하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서 이 승만은 정권 연장을 위해서 전쟁 중인 1952년 대통령 직선제, 양원제 국회를 주요 골자로 하는 1차 개헌안(발췌 개헌)을 비민주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통과시켰다. 이때의 대통령 직선제는 국민의 여망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국회의 의석 분포 상 재선이 어려운 이승만의 재선을 위한 것이었다. 이승만 정권의 권위주의적 모습은 점점 굳어져 갔고 급기야는 이승만의 3선 허용을 위한 2차 개헌안(사사오입 개헌)이 1954년 통과되어 장기 집권의 길을 열었다. 이승만은 1960년 3월 15일 4대 대통령에 출마하여 4번째로 당선되었으나, 부정 선거에 궐기한 전 국민의 저항에 의해 제1공화국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참고자료-발췌개헌안(拔萃改憲案)
1952년 7월 7일 부산의 피난국회에서 통과된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첫번째의 헌법개정. 대통령 직선제와 상하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정부측안과, 내각책임제와 국회단원제를 골자로 하는 국회안을 절충해서 통과시켰다고 하여 발췌개헌이라 이름 붙였지만, 사실상 이승만(李承晩)의 대통령 재선을 위하여 실시된 개헌이다. 52년 6월의 제2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이승만은 당시의 국회를 통한 대통령간선제를 통해서는 재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 대통령직선제와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였으나 부결되었다. 그러자 원외자유당과 원내자유당의 대결과 서민호(徐珉濠)의원 사건 등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이범석과 국회 내의 신라파(新羅派)가 중심이 되어 정부통령직선제, 양원제, 국회의 국무위원불신임제 등을 골자로 하는 발췌개헌안을 제출하였다. 이에 따라 구속중이던 10명의 국회의원이 석방되고 피신중이던 국회의원들도 경찰의 연행에 의하여 동원되어 7월 4일 밤 국회는 기립표결로 찬성 163표, 기권 3표로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이승만은 새 헌법에 의하여 같은 해 8월 5일 실시된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재선되었다. 그러나 발췌개헌은 위헌의 성격을 띤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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