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율곡 독후감 레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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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6.27 / 2015.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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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학자로 호는 율곡이다. 강릉의 오죽헌에서 태어나 어머니 신사임당의 교훈을 받으며 자라났다. 13세의 어린 나이로 장원급제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으며, 그 뒤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하여 9번이나 장원급제함으로써 ‘9도 장원공’이라 불리었다. 이이는 대사간 직책을 9번이나 맡아 입금이 올바른 일을 해 나가도록 힘썼다. 특히 나라의 힘이 약한 것을 걱정하여, 10년 안에 큰 전쟁이 있을 것이니 10만 군대를 키우자고 주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34세에 청주 부사로 임명되자 백성들의 자치규약인 ‘향약’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뒤에 그가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을 때 이 향약 운동을 크게 일으켰다. 선조 때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져 당파싸움이 심해지자 이를 화해시키려고 애쓰기도 하였으나 병으로 요양하다 49세롤 세상을 떠났다. 그의 저서로는 ‘격몽요결’,성학집요‘,’동호문답‘ 등이 있다.
이율곡을 읽고
경기도 파주에서 열리는 율곡 문화제 백일장에 참가한 다음 이율곡의 전기를 읽었다.
율곡의 이름은 이이였다. 율곡은1536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경기도 파주시에서 자랐다. 율곡의 아버지는 이씨 원자 수자이며 어머니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임당 신씨이다. 어머니는 어린 이이에게 여러 가지 학문과 글짓기, 그림 그리기 등을 가르쳐 주었다. 율곡은 열세 살 때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다. 열여섯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율곡은 3년 동안 어머니 묘 옆에 초막을 짓고 지냈다. 열아홉 살에 결혼한 뒤 산 좋고 물 맑은 곳을 두루 돌면서 세상에 퍼져 있는 여러 학문과 사상을 골고루 맛본 뒤 스물세 살 때 퇴계 이황을 찾아가 만났다. 그리고 그 동안 율곡은 아홉 번 과거를 보고 모두 장원 급제하여 세상에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스물아홉 살 때에는 호조좌랑으로 벼슬길에 나섰으나 율곡은 거의 학문의 길을 걸었을 뿐 정치에는 직접 나서지 않았다. 율곡이 정치에 나서기 시작한 것은 사회가 너무 어지러워 학문만 하고 있기에는 너무 마음이 편안하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는 사회를 새롭게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동호문답’,만언봉사‘,등을 써서 임금과 여러 사람들이 읽게 하였으며 그 밖에 ’성학집요‘,’기자실기‘,’격몽요결‘ 등을 세상에 발표했다.
율곡은 세월 따라 사회가 달라지므로 그 때에 맞는 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다들 뭐라고 말하기를 꺼리는 세조임금에 대해, 그 시대에 맞게 나라를 고치기 위해 한 일이라고 용감하게 주장했다. 율곡의 사상의 중심은 때와 곳에 알맞은 생각과 실천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성현들이 아무리 옳은 것이라고 가르쳤어도 그것을 실천하려면 때와 곳에 알맞게 고쳐나가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율곡은 일찍부터 윗물 맑기를 주장하였으며 스스로도 그렇게 살았다. 그는 임금에게 옛날에 정해져 그 당시에는 알맞지 않은 법을 고치자고 주장했으며, 학자들에게 시대를 잘 이해하여 당파 싸움을 멈추고 모두 화합해서 나라를 어려움에서 구해야 할 때라고 외쳤다. 그렇게 하여 나라의 기틀을 바로잡아 튼튼한 나라를 이룩하자고 임금과 여러 신하들에게 호소했다.
율곡은 어지러운 사회를 구하기 위해 앞장 섰다.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으로 고집을 부리거나, 이뤄지기 어려운 목표를 내세워 사람들의 불만을 사는 일 따위가 모두 사회를 어지럽히고 나라를 약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믿었던 율곡이었다.
이율곡을 읽고, 오늘날과 같은 사회에 이러한 분이 있었다면 참으로 존경받는 정치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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