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적 성찰성과 인식론적 정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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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적 성찰성과 인식론적 정의론
모든 역사적 이론과 그 이론을 둘러싼 학문적 논의 속에는 학문적 진리의 일면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는 점을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믿고 있는 한 사람으로써 자유주의 정치사상이 전개해왔던 무수한 논의들 역시 - 강력한 정치적 친화성에도 불구하고 - 시대가 요청하는 실천적 대안을 강하게 함축하고 있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연세대 이@@ 교수는 정치학이 정치적 레토릭이 난무하는 현실 정치 영역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언어적 기만성이 어떤 학문보다 크다는 점을 들며 정치학이라는 학문의 난해함을 토로하였는데, 그 말에 깊이 공감한다. 그 기만적인 정치적 레토릭으로 인해 자유주의 사상을 정확하게 인식하는데 지금도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능한 기존의 편견을 배제한 채, 자유주의 사상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특히 겨울 학기라는 짧은 기간 동안, 그것도 2차 텍스트에 의존하여 자유주의 사상을 개괄적으로 검토한 한계로 말미암아 자칫 자유주의에 대한 피상적인 비판으로 귀결되지 않도록 전공을 통해 배웠던 사회학 이론들 속에서 진지하기 다루기 위해 신경 썼다. 그러나 몇몇의 자유주의 사상이 전개하고 있는 논리는 그 심오함으로 인해 전혀 엉뚱한 논의를 비판의 준거로 삼는 경우도 있을 수 있으나 이는 전적으로 나의 한계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비판이 단지 비판으로 그치지 않기 위해서 자유주의 사상이 완성시키려 했던 개인의 자유와 권리의 실현을 어떠한 방향에서 실천적으로 보완할 수 있을지 민주주의 원리를 통해 살펴보려 한다.
1. 인식론적 자유
언제부턴가 내 삶의 화두는 행복이었다. 무엇이 진정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가. 우리는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는가. 삶의 문제를 주로 인식론적 차원에서 이해해왔던 나로서는 자연스럽게 행복의 문제 역시 인식론적 차원에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세상에 존재하는 실천적인 학문들이 추구하는 문제가 사실상 인간의 행복이란 문제를 가로지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행복이란 삶의 근본적인 지표였다. (행복이란 개념을 어떤 차원에서 전제하는가를 논외로 한다면 행복의 문제를 실천적으로 검토한 공리주의자들의 노력은 주목할부분이다.)
이와 동시에 행복에 대한 포괄적인 하위 담론들이 - 물론 통합적인 논의의 흐름 역시 존재하지만 - 대체로 인식론과 존재론으로 양분되어 전개되고 있음을 알았다. 이는 인식과 존재를 나눠 파악했던 서구 전통 철학의 프레임을 바탕으로 근대 학문 체계가 꽃피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현존하는 가장 강력한 담론체계인 자본주의 성장담론을 비롯하여 인간의 행복에 대한 대부분의 논의들이 - 심지어는 자본주의 해체를 주장했던 맑시즘마저도 일정부분 - 대체로 존재론에 치우쳐서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접근이 다소 생소할 수 있으나, 존재의 문제는 인식의 문제를 빗겨갈 수 없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사르트르의 주장이래로 실존철학과 현상학은 인식의 기반 위에서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 풍부한 논의를 전개하였으며, 이는 구성주의라는 좀더 포괄적인 사조에 의해 수렴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동안 자유주의 논의 속에서 소홀히 다뤄짐에 따라 무너져 내렸던 인식론이란 한쪽 축을 바로 세우는 것은 존재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인식과 존재의 균형 잡힌 체계 속에서 자유의 문제에 접근하는 것은 진정한 인간의 자유를 위해서 그리고 근대적 주체의 완성을 위해서 매우 중요한 작업이 될 것이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인식의 문제이든 존재의 문제이든 우리 모두는 행복을 추구하고 있으며, 어떠한 담론도 행복이란 외투를 걸치지 않고서는 행위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행위자에게 있어서 행복의 문제는 대단히 근본적인 행위 추구 동기인 것이다. 그렇다면 행복에 대한 보편적 정의는 존재하는 것일까? 포괄적인 규정은 가능한 것일까? 나는 이러한 물음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행복에 대한 어떠한 담론도 인간의 행위에 직접적으로 파고들 수 없다. 즉 인간의 행위는 행복에 관한 객관적 담론을 따라 기계적으로 전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설사 그렇게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은 사전적으로 통제된 정보에 의해 조작된 반응이거나 단지 사후적인 결과가 우연히 일치했을 뿐이다. 이글전반을 통해서 다루고자 하는 문제가 바로 전자의 경우이지만, 여기서 짚고 넘어가고자 하는 부분은 행복에 대한 어떠한 담론도 인간의 해석을 거치지 않고서는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행복의 문제는 객관적인 상황만큼이나 그의 주관적인 해석에 크게 의존한다. 존재론적 맥락뿐만 아니라 인식론적 맥락 역시 중요한 것이다.
아마도 자유주의자들은 현실세계에서 인간의 개별성을 발견하고자 노력했던 최초의 휴머니스트였던 것 같다. 인간의 개별성이 실현되어야 할 무엇이기 이전에 발견되어야할 무엇이었던 것은 역사적 과정 속에서 인간의 개별성은 ‘인간’이라는 집합적 프레임 안에 굉장히 모호하게 처리되어 왔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자들은 이 프레임을 해체시키고 봉건적 정치 질서 속에 파묻혀있던 ‘개인’을 발굴해 냈다. 서구 근대사에 있어서 개인을 발굴해 낸 사건은 인간의 모든 삶의 영역에 있어서 어마어마한 파열음을 불러일으켰으며, 근대 기획의 핵심 테제로 작동해 왔다. 더 나아가 자유주의자들은 근대화 프로젝트를 진척시키는 과정에서 분석적 차원의 자유를 경험적 차원의 권리로 구체화시켰다. 영국의 권리장전 속에 소극적 형태로 새겨졌던 개인의 권리는 근대 서구에 휘몰아 쳤던 혁명의 물결 속에 성문법의 형태로 보편화되었다.
개인의 권리를 둘러싸고 펼쳐진 자유주의자들의 지난한 투쟁은 동시에 권력의 정당성에 대해서 끊임없이 문제제기를 시도했던 과정이기도 했다. 봉건왕조와 기독교 질서로 대변되는 기존 집합체가 행사해오던 무소불위의 권력에 대해 제동을 걸었던 것은 명백한 자유주의자들의 공적이었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동일한 개념 틀로 파악하는 일군의 논리가, 적어도 두 사상의 친화성에 대해 의심치 않은 논리가 상식적으로 통용되게 된 것은 아마도 이러한 역사적 사건으로부터 연유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자유주의는 이념이고 민주주의는 절차다. 민주주의를 이념적으로 파악할 때 자유와 평등은 어느 한쪽도 뒤쳐지거나 앞서지 않는다.)
여기까지가 근대 기획 속에서 자유주의자들이 휴머니스트로서 수행한 역할이었다. 내가보기엔 휴머니스트로서 자유주의자들의 역할은 매우 시대적인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 역할은 출처가 불분명했던 부당한 권력으로부터 모호하게 처리되거나 종종 삭제되기까지 했던 ‘개인’을 발굴해내 그들의 개별성을 정당한 권리 체계로 성문법 속에 새겨놓고, ‘개인’ 속에 각인되어 있던 근대 기획을 작동시키는 범위 안에서 집중해야 했던 시대적 역할이었다는 점에서 한시적인 프로젝트였다. (물론 이러한 역할 규정은 사후적이고 당위적이다.) 그러나 그들의 프로젝트는 그렇게 담백하지 못했다. 또한 그들의 의도도 - 애초에 불순했던 것인지, 수행 과정에서 오염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 순수하지 못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들 의도의 순수성을 빌미로 자유주의자들을 법정에 세우는 일이 아니다. 그들의 이론적 결함을 검토하여 그들이 발굴해 냈던 개인을 근대적 주체로 가꿔나가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개인’으로 시작된 근대 기획은 ‘주체’로 완성됐어야 했다. 그러나 개인을 살려냈던 자유주의자들은 주체를 완성시키지 못했다. 자유주의자들은 오히려 자유의 문제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인식론적 측면을 사상함에 따라 개인을 주체로 승격시키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이들은 비록 과거의 부당한 권력이 그랬던 것처럼 개인의 자유라는 이름 하에 사회를 모호하게 처리하거나 질식시키지는 않았지만 개인과 연결되어 있던 사회를 깔끔하게 도려냄으로써 이제 막 근대 세계로 뛰쳐나온 개인의 지위를 매우 추상적으로 만들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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