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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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29 / 2015.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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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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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
마키아벨리즘(Machiavellism)이라는 단어가 있다. 단어의 의미는 목적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것을 성취하려는 태도를 뜻한다. 이 단어가 어디서 나왔는지 그 기원을 알아보면 마키아벨리라는 인물이 나오게 된다. 마키아벨리, 그 이름은 정치사상에서 있어서 극단적으로 평가 받는 인물이다. 그가 그렇게 평가받게 된 이유는 그가 집필한 『군주론』 때문이다. 그러면 이 『군주론』은 어떠한 책인가. 『군주론』은 마키아벨리가 공직복귀를 목적으로 메디치가에 바치기 위해서 집필한 작품이다.
『군주론』은 군주가 국가를 다스리기 위한 방법들을 서술하고 있다. 책은 군주란 목적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성취할 것을 서술하고 있으며 사랑을 받을 수 없다면 증오라도 받지 않도록 자신을 두려운 존재로 만들어야 한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서술이 그 시대의 사람들은 ‘악마의 대변자’라는 혹평을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19세기 이후 ‘정치에 대한 논리를 발견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그러면 그가 살았던 시대는 어떤 시대인가에 대한 의문이 들 것이다. 그는 1469년에 태어나서 1527년에 죽었다. 그리고 그는 피렌체 사람이었다. 그의 생몰연도와 그와 살았던 도시에 관한 정부가 그가 어떤 시대를 살아갔는지 보여주는데 그는 바로 르네상스를 시대를 살았던 인물이다. 유럽문화의 부흥기라고 여겨지는 르네상스, 그리고 그 르네상스의 수도였던 피렌체, 또한 우리들이 너무나도 잘알고 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와 같은 유명화가들과 동시대를 살았던 마키아벨리였기에 그의 사상은 이 자유롭고 문화적으로 번성했던 시기에 나온 근대적 정치철학이었다.
모든 사상과 이론은 그것이 형성되는 역사적 조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는 법이다. 더욱이 그 사상이 정치적 문제들과 직접 결부된 것이라면 당연히 그 시대의 정치적 조건과의 연관성 속에서 그 사상을 바라봐야할 것이다. 그러면 『군주론』어떤 정치적 조건 속에서 나올 것 일까라는 의문에 대해 책에서는 그 답을 알려주고 있다.
이탈리아인들은 이스라엘인들보다 더 예속되어 있고, 페르시아인들보다 더 억압받고 있으며, 아테네인들보다 더 지리멸렬해 있는 데다가 인정받는 지도자도 없고, 질서나 안정도 없으며, 짓밟히고 약탈당하고 갈기갈기 찢기고 유린당하여, 한마디도 황폐한 상황에 있습니다. (『군주론』, 26장)
이것이 그가 처한 정치적 상황이었다. 이탈리아는 통일되지 못한 채 분열된 도시국가와 공국들도 나누어 있는 상태였고 그렇기에 절대왕정국가들이 패권을 놓고 다투는 각축장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서 마키아벨리는 수없이 고민하였으며 결국 그는 그 상황을 타파하기 위한 답을 『군주론』에 서술해 놓는다.
지금 신에게 외세의 잔혹하고 오만한 지배로부터 자신을 구원해 줄 수 잇는 누군가를 보내달라고 이탈리아가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십시오. 또한 깃발을 드는 자가 나타나기만 한다면, 이탈리아가 얼마나 기꺼이 그 뒤를 따라나설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가를 살펴보십시오.(『군주론』, 26장)
이탈리아의 해방을 위해 필요한 것은 통일된 민족국가를 수립하는 것이고 이 통일국가를 세우기 위해서는 다양한 우연적 요인들과 적대적 의지를 가진 이들의 도전에 맞서 자기의 의지를 실현할 수 있는 강력한 정치 지도자, 즉 군주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결과 그의 『군주론』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군주론』는 위와 같은 정치적 상황과 함께 체사레 보르자라는 인물을 만나 그의 정치철학을 완성하게 된다. 체사레 보르자는 『군주론』를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할 인물이다. 마키아벨리는 이 인물에게 당대 이탈리아의 여러 가지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정치적 지도자의 덕목과 피해야 할 약점을 발견했을 뿐 아니라 정치적 실천의 외부적 조건이 가지는 커다란 규정력 역시 절감하였다.
체사레 보르자는 매우 흥미로운 인물로서 당시 교황이던 알렉산데르 6세의 서자(당시 교황의 자식들은 정식적으로 인정되지 않았음)로서 열여덟이라는 어린 나이에 추기경이 되었고 사제로서의 커리어를 쌓아갈 것으로 보였으나 추기경을 스스로 사임하고 교황군 총사령관에 취임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후원과 당시 유럽 최강국이었던 프랑스의 원조를 받아 승승장구를 해가며 이탈리아 지역의 강력한 군주로 떠올랐다. 하지만 1503년 아버지와 함께 말라리아에 걸리고 노쇠한 아버지는 죽음에 이르게 되고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그는 불운이 시작되면서 결국 반역자들과 전투를 벌이다가 전사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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