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나라야마 부시코 감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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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상문]
영화 나라야마 부시코
사람이 어떤 범죄를 저지르거나,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 일을 했을 때 우리는 흔히 저게 사람인가, 어떻게 사람으로서 그런 일을 할 수가 있지?라고 이야기 한다. 또 어떤 경우에는 객관적으로 따져봤을 때 잘못한 일이 아님에도 그래도 사람이 그렇게 하면 안되지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사람이 하는 여러 가지 행동들에 대해 우리는 왜 객관적 행위 자체 보다 인간으로서 해서 마땅한 일인지를 판단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일까? 여기서 나타나는 사람다움이란 어떤 것이며 사람이란 무엇일까? 영화 나라야마 부시코에서는 이러한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가 잘 나타나 있다.
영화는 자연의 동물적 삶과 대비하여 어떤 한 마을의 인간들의 삶을 묘사하고 있다. 이 마을은 현대 사회의 모습, 생활방식과는 차이가 있는 곳으로 묘사되지만 구성원 모두에게 일관되게 적용되는 나름의 관습과 규칙체제가 있다는 것에서 이곳도 하나의 사회공동체임을 알 수 있다. 산골 오지의 마을에서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의식주를 해결하는 일이다. 그들에게 겨울이 혹독한 것은 살을 에이는 추위보다 먹거리를 구할 수 없는 환경일 것이다. 자신들의 삶을 위해 자연을 이용하기도 하지만 대자연의 순리 앞에서 순응해야 하는 그들의 삶은 현재 우리의 시각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자신들만의 문화를 형성하였다. 문화의 대 전제는 마을의 규칙은 누구에게나 일관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모두가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장 크게 부각되는 것은 우리나라에 비추어 본다면 고려장이라고 할 수 있는 풍습이다. 70세가 되면 나라야마라는 곳으로 보내지는데 그곳에 직접 가서 실체를 알기 전에는 더 이상 먹고 살 걱정 없이 편안히 노후를 보낼 수 있는 이상향의 공간으로 알고 살아간다. 아니 그렇게 믿고 살아간다. 실상은 먹고 살기 힘드니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은 이제 그만 죽으라는 것이지만 이 실상이 잔혹할수록 더욱 까다로운 절차와 의식으로 치장하여 침묵한다. 더 많은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내는 내내 찝찝한 기분을 떨쳐 버릴 수 없었던 건 지금의 문화의 시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광경들이 계속 펼쳐졌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당연히 어떻게 저런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나, 인간의 기본적인 존엄성이 지켜지지 않고 있는 잘못된 사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화 상대주의에 따라 모든 문화는 나름의 사회 체제에서 타당성을 지니는 정당한 것으로 그 다양성은 인정되어야 하지만 인간의 존엄을 해치는 문화는 사라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지켜져야 하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판단 또한 어떤 한 문화의 입장은 아닐까, 그렇다면 지금 나의 시각으로 그들의 문화가 옳다, 옳지 않다를 판단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당장의 생존이 위협되고 있는 상황에서 인간의 가치, 인간의 존엄성은 전혀 중요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것은 도덕성에 기초한 판단인데 이 문화가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는 것은 우리 시각의 도덕성을 기반으로 한 판단이지 그들의 도덕성에 기반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윤리적 상대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행위의 도덕적 옳음과 도덕적 그름이 그 사회에 따라 다양하며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에게 구속력 있는 보편적인 도덕적 기준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한 개인이 어떤 방삭으로 행위하는 것이 옳은가의 여부는 그가 속한 사회에 의존되는 것이 된다.
물론, 인간의 존엄성은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영화 속 마을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런 건 배부를 때나 할 수 있는 소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마을 사람들에게 도덕성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밖으로 내던져지는 장소를 나라야마라는 이상향의 공간으로 표현하고 그것을 의식으로 포장한다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을 한다는 생각을 억누르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주인공인 첫째 아들 다츠헤이도 어머니 오린을 나라야마로 데려가는 것에 심적 갈등을 느끼고 있음이 묘사되고 있다. 또한 그 일에 대한 죄책감을 느낀다는 것도 알 수 있는 장면이 있었다. 영화 끝부분에 오린이 아들의 등에 엎혀 가면서 눈이 왔으면 좋겠다. 눈이 오는 것은 신이 자신을 반기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오린을 내려놓고 산을 내려가는 길에 정말 눈이 내렸다. 그러자 다츠헤이는 다시 어머니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 어머니, 정말 눈이와요. 정말로 눈이와요, 어머니 눈이 오니까 춥지 않죠? 눈이 와요 어머니라고 눈이 온다는 사실을 반복하여 말하였다. 어쩌면 이것은 자신이 어머니를 버렸다는 사실을 눈이 오니까 정말 신이 어머니를 반기는 것이라고, 정말 신은 존재한다고 나랴아마는 이상향의 공간이라고 그래서 정말 눈이 온다고_ 믿고 싶은 자기를 위한 되뇌임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잘못된 일임은 안다. 그러나 이 관습을 깰 수 없음도 너무나 잘 안다. 그것이 공동체의 존속을 위한 길이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음으로 스스로를 위로하고 정말 신이 있다고 믿고 싶어 하며 자신의 죄책감을 외면하려고 하는 것이다. 어머니를 내려놓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의 여느때와 다름없는 집안의 풍경, 아무렇지도 않게 밥을 권하는 아내, 어머니의 옷을 입고 있는 아내를 보고 잠시 눈이 흔들리지만, 바로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밥을 먹은 다츠헤이. 삶을 위한 어쩔 수 없음이 무섭지만 너무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삶을 위한 도덕성의 침묵은 어디까지 용인되어야 하는 것인지 도덕적 상대주의는 어디까지 인정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고찰이 조금 더 필요한 것 같다. 도덕성이라는 것 인간은 혼자 사는 존재가 아닌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필요한 것으로 개인의 도덕성은 타인에 대한 시각이 전제되어 있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각 개인의 다양성이 최대한 보장되면서도 타인의 시각을 함께 고려해야 하는 것은 아직 더욱 많은 고찰이 필요한 어려운 부분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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