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영화 장르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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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영화 장르의 역사
다큐멘터리란?
사전에서는 다큐멘터리를 ‘실제 사건을 일체의 인위적인 해석을 배제한 채 담은 것’이라 지칭하고 있다. 또한 다큐멘터리는 모든 요소가 잘 통제된 계획적인 에세이라고도 말한다. 다큐멘터리는 주로 언어와 이미지, 그리고 인간의 행동을 통하여 그 의미를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의 역사
들어가며
다큐멘터리 영화 장르의 역사를 정리하기에 앞서, 나의 노력 부족일지는 모르지만 한국 다큐멘터리 영화에 대한 자료나 정보가 별로 없어 정리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렇다고 국외의 다큐멘터리 역사를 정리하기에는 너무나 광범위하고 포괄적이었다. 그래서 한국 다큐멘터리 영화들 중에서도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의 역사를 정리해보았다. 실제로 현재 만들어지고 있는 다큐멘터리 영화들은 대부분이 독립 영화이고 다큐멘터리라는 장르가 영화계에서 일반화되고 보편적이지 않은 영화이기 때문에 주류 영화들보다는 독립 다큐멘터리의 역사를 정리하는 것이 한국 다큐멘터리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을 것 같아서이다.
1. 1980년대 : 격동의 현실 속에서 피어난 독립 다큐멘터리.
1982년 서울영화집단이 제작한 <판놀이 아리랑>(1982)은 충무로 영화계나 방송국 등 주류 매체 바깥에서 제작된 최초의 다큐멘터리라 할 수 있다. 박광수, 김홍준 등 주류 영화계의 감독들이 제도권 영화계로 진출하기 이전에 서울영화집단이라는 소집단 활동을 하면서 만들어낸 작품이다. 이 영화는 <판놀이 아리랑고개>라는 연극무대를 소재로 하여 만든 작품으로 영화 소집단의 습작이라 해도 좋을 소박한 수준의 작품이다. 그러나 ‘반성’ 혹은 ‘성찰’의 의미가 담겨 있다는 점에서 쉽게 지나칠 수 없다. 그것은 ‘상황’과 ‘해석’이라는 다큐멘터리의 구조에 대한 환기와, 1980년대의 현실과 당대 현실 속에서 예술의 의미에 대한 ‘반성’을 겨냥하고 있다.
1984년, 얄라셩이 제작한 <이 땅의 갈릴리 사람들>과 <민주화 투쟁 25년>이라는 작품이 제작되었다. 전작품은 서울시와 건설 회사에 대한 방배동 철거민들의 농성과 투쟁을 생생하게 기록한 작품으로, 기독교 청년단체의 제안을 받은 얄라셩 회원들이 겨울방학 동안 철거촌을 지속적으로 방문, 취재하여 만들어낸 영상 보고서이다. <민주화 투쟁 25년>은 4.19부터 시작된 과거 학생운동의 역사를 자료화면과 보도 기사 등으로 재구성하고, 1980년대 초반 당시 학생운동의 모습을 기록하여 역사 및 보도물 형식으로 묶어낸 작품이다. 이 두편의 다큐멘터리는 학생운동, 민중운동에 영상으로 참여하고자 하는 그들의 의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정치적으로 유화국면에 들어섰던 1984년 당시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진보적 관점의 영상물에 대한 갈망이 대단히 높았던 듯하다.
1980년대 말, 비디오의 보급으로 영화 제작이 보다 편리해지며 영화를 사회운동, 문화운동의 한 영역으로 위치 짓기 시작한다. 이 무렵 서울영상집단(86년), 민족영화연구소(88년, 여성영화집단 바리터(89)년 등의 단체가 결성되어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이 무렵 만들어지는 다큐멘터리 영화들은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 통일운동의 현황과 과제를 다루거나 모슨된 한국 사회 현실에 대한 폭로와 비판의 내용이 거의 전부를 차지했다. 6월 민주항쟁을 다룬 작품 김재호 감독의 <민중이 주인이 되는 그날까지>, 최루탄에 맞아 숨진 이한열 열사의 민주화 투쟁과 죽음의 의미를 다룬 작품 <그대 부활하라, 민족의 꽃으로> 등이 1987년에 제작되었다. 6공화국의 본질을 기록한 <5공이 6공인데>(1988), 탁아현실에 대한 고발 <우리네 아이들>(1990) 등 다양한 소재와 주제의식을 담은 다큐멘터리들이 활발하게 제작되었다.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의 대부인 김동원 감독이 다큐멘터리 영화를 시작하게 된 것도 1980년대 말이다. 그는 어느 선배의 부탁을 받고 상계동 철거 현장을 찍으러 그 곳에 들어가 폭력적인 현장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 곳에 눌러 앉아 결혼식 알바를 하려고 샀던 비디오 카메라로 그들의 모습을 포착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완성된 <상계동 철거>라는 영화는 은폐된 현실을 대중적으로 알려나가는 비디오 매체의 힘을 확인 시켜준다. 그 힘을 이어 받아 2부, <상계동 올림픽>이라는 작품도 제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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