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으로 배우는 철학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감상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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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29 / 2015.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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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으로 배우는 철학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소통의 갈구
때 묻지 않은 동심이 불러일으킨 감동을 이 영화에서 읽어낼 수 있음은 자명하다. 그러나 그 순수하고 따듯한 마음에 웃고 자리에서 일어서기에는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답답함이 차오르는 것을 느낄 것이다. 영화 내내 보는 이의 마음을 먹먹하게 했던 그 무엇, 영화가 끝난 후에는 가슴 속에 앙금으로 남아 오래도록 달그락 달그락 거리며 내 마음의 평안을 휘젓는 그 무엇은 이 작품을 단순한 동심의 향수를 보여주는 영화로 정의하지 못하게 한다. 자칫 이 영화가 의미하는 전부라고 보일 수도 있는 아이들의 순수함이 그렇게 찬란하고 애틋하게 느껴졌던 것은 마음을 굳게 닫고 그 누구의 침입도 허용하지 않은 어른들의 어둑한 마음과의 대비 때문이 아닐까. 다시 말하면, 의식차원에서 일어나는 인간행동의 근원적 이유를 무의식에서 찾을 수 있는 것처럼, 영화 속 아이들의 천진난만함이 수면 위에서 반짝이는 것은 그들을 둘러싼 어른들의 아둔함과 서로에의 무관심이 수면 아래에서 음산하게 자리하며 그들의 차이를 부각시키기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이 영화의 본질에 좀 더 다가가기 위해서는 동심의 찬란함이 아닌, 그 아이들의 눈을 서글프게 만들었던 이유에 눈을 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영화에서 ‘아마르’와 ‘네마자데’를 비롯한 아이들의 눈동자를 간혹 답답함과 서러움으로 젖게 만들었던 그것은 개인을 소외로 이끄는 ‘소통의 거부’ 혹은 ‘소통의 억압’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영화의 처음, 자꾸만 삐걱대며 열리는 교실의 푸른 문을 생각해보자. ‘아마드’와 ‘네마자데’가 수업을 듣는 이 교실은 아이들의 수업과는 어울리지 않는 엄숙함과 긴장으로 가득 차 있다. 묻기 전에는 말을 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고 또 숙제를 해오지 못한 아이들이 각자 해명을 하려할 때 그들의 이야기에는 일절 귀를 기울이지 않은 채 자신이 한 이야기는 어디로 알아들은 거냐며 으름장을 놓아 결국 아이의 눈물을 빼고 마는 교사의 모습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문을 밀어대는 아이들을 매몰차게 질서와 절제라는 이름으로 그 문을, 소통의 기회를 닫으려 하는 모습의 상징으로 읽을 수 있다. 이러한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가하는 ‘소통의 거부와 억압’은 영화의 흐름 내내 존재한다. ‘아마르’의 어머니나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창문을 다는 또 다른 ‘네마자데’의 아버지 역시 끊임없이 그들에게 도움과 필요를 외치며 다가오는 ‘아마르’를 외면하며 귀를 닫아버린다. 그들의 귀는 듣기 위해 존재하되 들을 수 없는 귀이다. 자신이 듣고 싶은 말을 듣는 귀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입만 존재할 뿐, 다른 이와의 소통을 하기 위한 귀와 입은 존재하지 않는 자들이다. ‘아마드’의 이러한 일방적인 소통에의 시도는 마치 그가 친구 ‘네마자데’의 집을 찾고 싶으나 밤이 깊도록 찾을 수 없었던 것처럼, 소통의 출구나 방법을 찾지 못한 채 메아리 처럼 자신에게로 되돌아온다. 이와 같은 ‘아마드’의 공허한 시도는 ‘네마자데’의 집을 찾지 못하고 같은 길을 빙빙 도는 것으로 형상화 된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영화의 본질이 인간 사이의 소통에 관한 것임을 좀 더 분명하게 암시하여 주는 것이 있다. 바로 ‘문’이다. 앞서 교실의 푸른 문에서 보았던 것처럼, 영화 안에서는 이 ‘문’을 통하여 소통의 문제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이 문에 관여하는 두 인물이 나오는 데 이 둘은 소통에 관한 문제에서 양 축을 이룬다. 한 인물은 문짝을 다는 일을 하는 또 다른 ‘네마자데’의 아버지이고 다른 한 인물은 또 다른 ‘네마자데’의 할아버지이다. 이 부자는 같은 일을 하면서도 상반된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다. 앞서 말한 ‘아버지’는 오래된 문을 철문으로 바꿔다는 일을 하고 있고, ‘아마드’의 말을 듣지 못하는 자, 소통을 거부하는 자이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전통적 기법의 정교한 문을 직접 만들었었고 그 문을 선물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인물로, ‘아마드’의 외침에 성의어린 응답을 준 인물이다. 이는 소통을 상징하는 매체인 ‘문’의 소중함을 아는 자와 그 정겨움을 냉랭한 쇠문으로 바꿔다는 자로 대비시킴으로써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이 어떻게 퇴색되어 왔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영화는 더불어 사는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 중에 하나라고 볼 수 있는 인간 사이의 소통이 현대에 이르러 퇴색되었음을 아이와 어른의 대비를 통해 보여주고 있었다. 또한 ‘문’이라는 상징적 소재를 통해서도 소통의 의미변화를 보여주었고, 들을 수 있는 자와 들을 수 없는 자를 상정해 놓음으로써 ‘소통의 결핍’이 만연한 현재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어떤 것을 지향해야 하는 지 그 출로를 열어주고 있다. 소통의 필요와 소통의 소중함이 아이들로서 상징되었다면 소통을 거부하고 개인의 소외를 낳는 것은 어른들의 모습으로 상징 될 것이다. 그렇다면 들을 수 없는 대답으로 길을 찾지 못했던 ‘아마르’ 곁에서 어둠으로부터 그를 지켜주고 상대를 향한 인내를 보여준 자인 ‘할아버지’는 영화가 우리에게 제시해 주려는 ‘소통으로 가는 길’을 의미할 것이다. ‘할아버지’는 ‘아마드’에게 결국 올바른 길을 찾아주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아마드’를 위해 최선을 다했던 그의 마음은 결국 ‘아마드’의 ‘네마자데’를 향한 진심이 통하는, 즉 둘의 소통이 이루어지는 밑거름이 된 것이다. 서로의 소리를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잘 들을 수도 없는 현재의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노력은 바로 ‘할아버지’의 것과 같은 종류이리라. 완벽하진 않아도 상대에 대한 애정과 인내로 소통의 문을 열어놓는 것. 영화는 이러한 노력이 있을 때, 현실을 조금 더 아름다워 질 수 있다고 이야기 하는 것 같았다. 마치 ‘네마자데’의 공책에 살포시 꽂혀있었던 소박하지만 아름다웠던 꽃송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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