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아는 루터 아무도 모르는 루터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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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아는 루터, 아무도 모르는 루터 서평
루터는 기독교에서 예수를 제외한다면 일반적으로 가장 유명한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기독교인의 입장에서는 베드로, 바울, 요한 등등의 사람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겐 루터라는 이름이 더 익숙하기 때문이다. 루터는 이렇게 알려진 인물인 만큼 그가 살면서 이룬 것들도 방대하고 많다. 하지만 인간 루터는 어떻게 보면 너무나 힘든 삶을 살아온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의 인생은 고뇌와 반성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가 행복한 삶을 살았다면 그는 신에게서 구원을 찾기 위해 그 많은 고민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루터가 살던 시대는 당연히 누구나 기독교 신자였다. 하지만 누구나 루터와 같은 삶을 살지는 않았다. 그는 왜 그러한 삶을 살았을까? 루터가 행정가가 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그는 수도사가 되었다. 수도사가 된 후 그는 인간이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을지에 대해 끝없이 고민하게 된다. 신 앞의 인간의 모습에 대한 그의 생각은 너무 저자세로 보인다. 왜 그는 자신을 그렇게 낮춰가며 스스로 죄인의 모습을 보였을까? 인간이 항상 신 앞에서 죄인이고, 그런 인간이 구원받는 방법은 오로지 신에 의한 것 뿐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기존의 카톨릭도 큰 틀에서는 비슷하겠지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하느님의 나라인 카톨릭 국가에서 살면서 하느님을 믿고 예배에 참석하고 성실한 삶을 살면 구원 받는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루터는 인간이 죄인으로서 구원받기 위해선 다른 무엇인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는 단순히 주어진 관습 속에서의 기독교인에서 나아가 진정으로 구원받기 갈구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그 구원의 길을 성서에서 찾게 된다. 기독교인의 전통과 관습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 안에서 스스로 진정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를 구원의 길로 본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궁금한 점이 왜 성서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깨달아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 복종의 자세로 성서를 따르냐 하는 것이다. 루터는 왜 그렇게 인간 스스로를 낮게 바라보았는지 궁금하다. 일반적으로 아브라함 전통의 일신교에서 신과 인간의 관계가 다른 동양종교 등에서 나타나는 모습보다는 인간보다 신을 상당히 높은 곳에 두고 있는 것은 잘 알지만, 루터의 경우는 그러한 모습이 더욱 많이 나타나 보인다. 그는 자신을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평생 그 죄책감을 없애기 위해 더욱 성서에서 그 방법을 찾은 것 같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과거로 돌아가서 루터가 왜 그러한 죄책감을 가졌는지에 대해 어린 시절을 관찰해 보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루터의 모든 생의 원동력이 바로 이것이기도 하다. 그는 죄책감으로 인해 끝없이 인간에 대해 고민하고, 구원받기 위해 신에게 매달리고, 성서를 끝없이 파고 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결국 기존의 카톨릭에서 교황을 중심으로 한 체제 위주로 형성된 기독교를 비판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하여 성서 안에서 인간이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고 이를 계속 발전, 체계화하게 된다. 이렇게 이루어진 그의 사상은 여러 형태로 대중과 교황에게 전해지지만 교황청은 그의 이러한 생각에 전혀 동의할 자세를 보이지 않는다. 이에 의견이 갈리기 시작한 둘의 사이는 결국 완전히 결별하게 되어 신교와 구교로 나눠지는 핵심 요인이 되고 만다.
비종교인인 나의 입장에서는 루터의 종교개혁의 중심사상이 기존의 카톨릭과 얼마나 많은 차이가 있고 얼마나 더 나은 것인지 판단할 수가 없다. 종교란 밖에서 보면 안을 판단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안에서 본다고 하여도 나의 종교와 나와 다른 종교, 종파만 있을 뿐일 수도 있다. 왜냐면 루터도 강조하였듯이 종교는 믿음이기 때문이다. 내가 믿으면 오로지 진리요 빛이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나의 입장에서 보면 루터의 이러한 고민은 사실 카톨릭이 이어져 오면서 많은 종교인이 해 왔던 가장 핵심적인 고민일 것이다. 죽은 다름에 어떻게 되는것일까, 죽은 후에 천국에 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고 천국에 갈수있을까, 어떻게 사는 것이 신의 뜻을 따르는 것일까 같은 고민은 답이 없는 숙제인 것이다. 초기 카톨릭에서도 공의회에서 삼위일체설 같은 교리적인 고민부터 시작하여 많은 것들을 고민하여 답을 이끌어내고 카톨릭의 체계를 이루었다. 이들의 입장은 당시로 보면 개혁이었다. 하지만 카톨릭은 오랫동안 이어져오면서 틀에 갇혀서 더 이상 고민하지 않게 되고, 부패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루터같은 사람이 나오는 같은 필연적인 일일 것이다. 루터를 초기 카톨릭의 체계를 이룬 사람들과 비교해보면 초기 카톨릭 공의회에서는 많은 이론, 학설을 정리, 선택한 것에 비해 루터는 종교의 중심을 이론, 체계에서 사람의 믿음으로 이동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루터가 이룬 것이 더 중요하고 큰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 과정이 거의 대부분 자기 스스로 반성하고, 고뇌하고, 연구하여 혼자 이루어 낸 것이라는 것이 더욱 놀랍다. 수도원의 다락방에서, 또는 반강제적으로 감금되어 있었던 성에서 그는 얼마나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고민하였겠는가.
루터는 신학적으로는 개혁적이었지만 다른 방면에서는 반대되는 면모를 보이기도 하였는데, 농민전쟁이 일어났을 때에도 그는 기존의 봉건적 신분제를 옹호하는 자세를 보인다. 루터가 기존의 종교체계인 교황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그것을 부정하고 신교를 이룬 중심인물이라는 점에서 볼 때, 정치사회적 기존체제인 봉건제를 열렬히 옹호하는 것은 매우 아이러니한 상황이 아닐 수가 없다. 그는 이러한 측면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종교 개혁은 이루었지만 개혁된 종교가 기존의 봉건제와 더욱 굳건히 결합하여 봉건군주의 지배도구로 이용되기도 하는 것은 루터를 과연 개혁적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게 한다. 사실 루터는 상당히 보수적인 사람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의 기독교의 개혁에 대한 새로운 사상은 종교개혁의 중심이 되었다. 하지만 루터는 기독교는 개혁하기를 원하였다기 보다는 기존의 카톨릭과는 다른 자신의 생각들을 널리 알린 것 뿐일지도 모른다. 내 생각이 남과 다르다고 내 생각이 개혁적인 것이 아니듯 루터도 개혁성향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다른 생각이 기존의 카톨릭과 대립하게 되고 종교개혁이 이루어지는 가장 중요한 시작점인 것은 분명하다.
루터가 종교개혁의 시작이고 중심인 것은 누구나가 인정하고 있고, 루터의 뛰어난 지적능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루터의 종교개혁은 개혁과 동시에 너무 빨리 보수화 되었다. 루터의 개인적 성향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기독교의 구습을 개혁하여 신교로 등장하였지만 다른 신교를 인정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 종교개혁이란 어떠한 시점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진행형으로 존재해야만 하고,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신교가 신교를 탄압하고, 개혁적이었던 교회가 극단적 보수로 변형되는 모습을 보면서 어떠한 종교가 개혁적인가 보수적인가 하는 것은 결국 당대의 그 종교인들이 어떤 자세를 취하는가의 문제이지 그 종교적 교리의 보수적, 진보적 논리와는 별로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수가 있다. 루터가 역사적으로 뛰어난 인물임에는 분명하나 그가 과연 종교 개혁을 이루었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그는 종교개혁의 흐름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그의 종교개혁은 과거에서부터 내려와서 그를 거쳐서 현재에도 계속 진행 중이라고 본다.
종교개혁이란 중세의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그것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나 뉴턴의 자연과학법칙처럼 세상의 핵심기틀이 뒤바뀌는 새로운 세상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 시대의 종교개혁은 지금 우리가 보는 종교개혁의 의미와 상당히 다르고 큰 의미로 다가왔겠지만, 지금의 우리는 종교개혁을 과거의 역사책에서 찾아볼 수 있는 역사가 아니라, 지금 자기 안에서 진행 중인 변화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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