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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욱『게임의 규칙』감상문
김경욱의 단편 <게임의 규칙>은 1980년대라는 시대배경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었다. 위장취업을 하고 공장 노동자들을 의식화 하는 대학생, 그러다가 남파간첩단 사건으로 검거되는 그 학생, 그 시대에 막 생겨났던 프로야구와 야구장의 풍경들... 대학생은 형이 국어선생으로 재직하고 있는 지방으로 검거를 피해서 온 것 같다. 주인공 김광수의 아버지의 말씨를 보아하니 주인공의 고향은 호남의 어느 농촌 지역이지 않을까.
소설의 시작은 주인공 광수가 지방 방송국의 어떤 퀴즈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대망의 우승자를 가리는 마지막 문제를 푸는 장면이었다. 우승상품으로는 제주도 3박4일 여행권과 42인치 벽걸이 텔레비전이 걸려있다. 광수와 그의 아버지는 연고도 없는 도시로 이사를 왔고, 광수의 고객이 떼먹고 달아난 자동차 할부금 때문에 생긴 카드빚으로 경제적으로 안 좋은 상황이다. 아버지는 이사온 이후로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있고 TV 시청만을 유일한 낙으로 하며 살고 있다. 그런데 텔레비전은 중고로 산 14인치이고 상태가 매우 안 좋다. 사회자가 문제를 말하면서 “얼마전 자신이 운영하는 마작하우스” 얘기가 나오는 것에서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너구리’ 장명부에 대한 문제겠구나 바로 알았을 것이다. 여기서 소설은 과거의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주인공이 태어났던 때부터 시작해 성장하는 과정에서 겪었던 비범하지 않은 사건들을 말하기 시작한다. 광수는 다른 아이들보다 일찍 말문이 틔였고 가르쳐주지도 않은 글씨를 술술 읽어내었다. 더군다나 갓난쟁이가 “신은 없다” “이 세계는 엉덩이 뒤에 갖고 있어서 인간과 다를게 없다” 이런 난해한 말을 막 해대니 광수의 부모는 그를 천재로 생각한다. 물론 광수에게 천재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문구들은 집에 세들어 사는 철학전공 대학생의 책들에서 본 것들이었다. 결국 광수는 다른 애들보다 2년이나 일찍 취학을 하게 됐다. ‘뭐 그정도 갖고 천재냐’, ‘어릴땐 다 똑똑해’ 할 수도 있겠지만 광수는 확실히 비범하긴 비범하다. 그게 학교공부 재능까지 이어지지는 않지만 그의 암기능력과 암산능력은 정말 대단하다. 암기능력은 칠판에 적혀있는 문장과 글자수가 같은 문구를 골라서 기억해낼 정도이고, 암산능력은 텔레비전에 영재 아이로 출연했을 때 숫자의 자릿수가 높아짐에도 전혀 움츠리지 않고 암산을 척척 해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는 경쟁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경쟁에 관심이 없는건지 경쟁에 취약한건지 확실하진 않지만 그는 경쟁의 장에서는 능력을 발휘하지 않는다. 소설의 제목인 ‘게임의 규칙’이란 칠판에 적혀있는 ‘철수야 뭐하니’ 따위의 쉬운 문장의 글자 수와 같은 글자수의 난해한 문장을 광수가 기억해내야 되는 것이다. 다른 급우들이 칠판의 유치한 문장을 따라 읽을 때 그것을 시시해 하는 광수는 자기가 알고 있는 심오하고 철학적인 문장들을 발음한다. 그런데 어느 날 급우들이 광수를 놀려먹을 작정으로 합심해서 칠판의 문구를 따라읽지 않았고 광수 혼자서만 말을 하게 됐다. 그 문장이 뭐냐면 “자본은 노동을 소외시킨다” “소외된 노동은 자본을 전복시킨다” 이런 것들이다. 담임선생은 깜짝 놀랐고 광수를 교무실로 끌고가 이런 문장들을 어디서 알게된 건지 추궁했다. 그렇게 해서 국어선생의 동생이자 광수네 집에 세들어 살던 그 대학생은 체포되어 끌려가게 되었다. 운동권 학생이었던 것이다. 텔레비전에서는 남파 공작원에게 포섭된 조직의 일원으로 나온다. 진짜 간첩단인지 공안기관에서 조작한 사건인지는 나오지 않으니까 알 수 없다. 가계도라고 해놓고서 왜 여자는 하나도 없는 걸까 의아해 하는 광수의 시각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표현할 뿐… 이 사건을 겪고서 광수는 문장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 그런 것들에서 흥미를 잃어 버렸다.
광수가 문장 다음으로 빠져들게 된 것은 숫자이다. 광수의 부모는 아들의 재능을 의식해 서울로 이사를 가게 됐고, 교장선생이 전학가는 그에게 당부하는 말을 전할때 옆에 걸려있던 ‘저축 실적 표’를 본 것이 숫자에 빠져든 계기가 되었다. 이제 그의 천재성은 숫자를 계산하는 능력으로 발휘되기 시작한다. 광수는 너무 조숙해서 또래 아이들을 시시하게 생각했으므로 고향의 학교에서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고 전학간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우연히 방송국에서 그의 재능을 알게 되어 영재소년으로 프로그램에 출연하였고 그곳에서도 뛰어난 산수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해서 하루아침에 학교에서 스타가 되었고 급우들의 대우도 달라지게 되었다. 다만 전자계산기와 광수의 산수실력을 겨뤄보는 자리를 가졌을 때에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는데 광수는 경쟁의 장에서는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광수의 아버지는 원래 야구를 좋아했는데 서울로 이사오면서 좋아하는 야구를 많이 볼 수 있게 되었고 생업도 잠실야구장 앞에서 장사를 하는 것이 되었다. 포장마차에서 아버지는 소주,오징어를 팔고 어머니는 김밥을 팔았다. 아버지는 입장료를 안 받는 6회 이후가 되어야 야구장에 입장해서 광수와 야구를 봤다. 아버지는 자기가 응원하는 팀의 경기가 아닐 때도 야구를 봤고 승부에 무척 집착했다. 한번은 아버지와 광수가 빙그레이글스와 MBC청룡의 경기를 보러 갔다. 아시안게임으로 나라가 들썩였을 때라고 나오니까 86년인 것 같다. 한화이글스의 팬인 내가 알기로도 이글스가 리그에 참가한 첫 해는 1986년이 맞다. 문제의 인물 ‘너구리’ 장명부가 이글스의 구원투수로 등판해 마운드로 올라온다. 장명부가 삼미에서 뛴 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그가 이글스에서 뛰기도 했다는건 모르는 사람이 더 많다. 김경욱 작가는 굉장히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인가 보다. 장명부는 6대5로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 등판해 8회에는 동점을 주고 9회에는 연속안타로 주자를 두명 둔 상태에서 보크를 범한다. 그래서 주자들이 한루씩 더 진루한 상황. 여기서 장명부는 판정에 항의하는 뜻으로 고의로 보크를 한번 더 범해버리면서 경기는 청룡의 승리로 끝나 버린다. 장명부의 15연패. 터져 나오는 관중들의 야유와 쓰레기 투척. 광수는 또다시 환멸을 느낀다. 분명히 지금 이 순간 경기장에서는 무수한 일들이 벌어졌다. 긴장, 탄식, 분노, 번민… 그런데 스코어보드에는 숫자 ‘1’ 덜렁 하나 기록되다니 이게 말이 되나. 숫자는 승패의 결과만 보여줄 뿐 아무것도 해명해주지 못하는 것이라 생각하니 뻔뻔하고 가증스럽다고 느껴지는 거였다. 나에게는 이 소설에서 이 부분이 제일 재밌는 부분이었다. 진지하게 썼는데도 너무 웃긴 거다. 광수의 생각에도 공감이 갔다. 기록은 결과만을 보여줄 뿐 과정은 보여주지 못한다. 이후 광수는 점점 평범한 인물로 전락해 간다. 문장을 버린데 이어 숫자도 버린 그는 새로운 것을 찾지 못했다. 게다가 어머니는 교통사고로 돌아가신다. 서울올림픽 때문에 포장마차의 대대적인 단속이 있었고 모아둔 돈으로 분식집 점포를 계약하고 간판을 주문하러 가시던 어머니는 술취한 차에 불의의 사고를 당한다. 올림픽과 도시 미관 정비, 행상, 철거, 단속… 매우 1980년대적인 광경들이다.
다시 퀴즈를 풀고 있는 장면으로 돌아온다. 정답이 ‘장명부’인 문제였지만 광수는 ‘15연패’라고 말을 해서 틀려 버린다. 장명부의 15연패를 알고 있는 광수가 장명부 본인을 모를 리는 없을 것이다. 일부러 패배를 택한 것이다. 그는 상투적인 승리 대신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독창성을 찾으려고 한 것이었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승리한 자,성공한 자,빛나는 것만 떠받들고 찬양해주는 세태에 대해서 불편함을 느끼고 패배자나 못나가는 사람들에 대해서 관심을 주는 박민규 소설같은 풍을 느꼈다. 한시즌 30승을 했으면서 또한 한시즌 25패까지 해봤던 장명부라는 투수는 성공과 좌절이 공존하는 경우였다. 과정을 담지 못하고 결과만 담아내는 스코어보드에 환멸을 느끼는 주인공. 마지막 문제를 맞추어 우승자가 될 수 있지만 일부러 패배를 택해 버리는 장면. 슬프고 어두우면서도 유머가 담겨 있는 괜찮은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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