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안에서 ‘나’의 삶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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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로스적 시간 안에서 ‘나’의 삶의 의미
시간의 양상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었을 때, 객관적인 지표로 항상 흘러가는 시간을 상징하는 것이 헬라어로 크로노스이고, 나에게 유의미하고 전환점적인 성격을 갖는 ‘순간’을 뜻하는 시간은 카이로스이다. 150억년이라는 긴 시간의 흐름의 퇴적 속에서 ‘나’란 존재가 인지하는 시간은 찰나와 다름없다. 따라서 사람은 그저 흘러가는 객관적인 지표로서의 크로노스보다는 자신을 중심으로 의미있는 카이로스적 시간의 인식을 지닌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적 측면을 확장해나간다면 시간은 ‘나’의 탄생과 같이 생겨나고 ‘나’의 죽음과 같이 소멸된다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150억년 간의 객관적인 크로노스적 시간의 흐름에서 ‘나’라는 특정한 존재가 생겨날 확률은 상식적으로 따져도 지극히 낮고, 객관적 현상으로서의 크로노스적 관계성이 유독 ‘나’에게 있어 유의미하고 주관적인 카이로스적 시간을 낳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서 내가 생겨나는 이러한 기적과도 같은 상황이 바로 ‘창발’ 현상이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기에,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생명을 정의한다면 생명은 바로 ‘나’라고 할 수 있다.
한 인생은 살아가면서 ‘나’란 주체의 관계 지음의 연속이다. 나의 탄생을 위한 나와 부모의 관계, 수정란 상태에서의 나와 모의 관계, 나와 배우자와의 관계 등 일생의 대부분이 ‘나’라는 관계의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렇게 나를 중심으로 관계를 맺고자 하는 욕망의 누적을 통해 지금의 내가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아무리 ‘나’라는 존재를 중심으로 카이로스적 시간 인식이 이루어지고 나를 생명의 중심에 위치시키더라도, ‘나’는 나를 포함한 타자와의 관계에 의해 큰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간과하면 안 된다.
그렇다면 기적과도 같지만 찰나의 순간을 살아가는 ‘나’가 주체적으로 유의미한 삶이자, 대 변환점, 즉 상전이를 일으킬 수 있는 카이로스적 인식을 지니고 삶을 영위해나가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나의 관계망을 넓혀나가는 것이다. ‘나’는 관계로 인해 비롯되었고, ‘나’는 관계를 만들어나간다. 언뜻 보면 관계 지음이 한정된 방향성을 나타내는 것으로도 보일 수 있지만, 이 순환의 고리는 더 큰 관계 지음, 즉 한 층 더 근원적인 관계 안에 포섭될 수 있다. 그리고 이 근원적인 힘은 또 다른 관계 지음을 통한 창발현상으로 새로운 ‘나’를 만들어낸다. 다시 말해서, 지금 나의 관계 지음이 다시 나를 관계 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확장해서 본다면, 내가 관계 지음에 쏟는 힘에 반응하여 기하급수적인 힘이 내게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이처럼 나의 현존하는 자아, 즉 카이로스적 자아가 그물망을 넓힐 때 발현되는 나비효과 현상에 의해 다시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인식할 때, 왜 내가 나의 관계망을 넓혀가는 것이 의의가 있는지 설명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나의 관계망’을 어디까지 뻗쳐나가야 할 것인가. 이에 대한 답을 서양과 동양의 정신에서 찾아볼 수 있다. 먼저 서양의 종교학자 ‘로드릭 내쉬’는 우리가 뻗어야 나가야할 관계 지음의 범위를 ‘인간 윤리의 역피라미드’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는 자아-가족-민족-인종-인류-포유류-동물-식물-무생물 의 단계로 동류의식을 느끼는 관계를 구분짓고 우리가 무생물의 단계까지 더 넓은 동류의식을 느낄수록 윤리적으로 진화된 의식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가이아가설’에 따르면 지구는 단순히 하나의 물체덩어리가 아니라 생명이 존재하는 유기적 존재로서 모든 것을 포괄하고 만물과 관계맺는 존재라고 말하며 지구단위적인 관계망의 형성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동양에서는 ‘비바람에 꺾어진 나뭇가지와 소나기에 의해 떨어져 깨진 기왓장에도 측은함을 느낀다’ 라고 말했던 왕양명이 관계 지음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었다고 말할 수 있다. 또 힌두교에서는 나의 원리인 아트만(Atman)과 우주의 원리인 브라만(Brahman)의 합일을 강조하면서 우주와의 관계 지음이라는 넓은 차원에서의 근원적인 힘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 고대의 사상인 태극에서는 만물이 태극의 일원(一元)에서 생성 전개되었다고 보면서 만물의 관계지음을 언급하고 있다. 이렇게 볼 수 있듯이 수많은 성현과 종교가 관계 지음에 역점을 두었고, 이들은 보다 넓은 차원에서의 관계의 힘을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열린 욕망 안에서 관계성을 넓히고자 했던 사람들은 단순히 시간을 서양의 이분법적이고 기계론적으로 보길 거부했다. 서양에서는 ‘나’를 포함한 생명체를 삶과 죽음의 표면적이고 이분법적인 현상에만 주목했다. 그리하여 ‘나’가 나와 관계 맺어진 생명체에 폭력을 가했을 때 나에게 돌아올 파급을 전혀 생각지 못했다. 그래서 모두가 각자의 관계망에 있어서 중심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보다 오로지 ‘자기중심적’인 관계망 속에서 타자를 인식하였고 닫힌 욕망 속에서 카이로스의 유의미한 시간을 낭비하였다. 오늘날 환경운동의 고전이 된 토양연구자 레오폴드(A. Leopold)는 지구의 고등동식물 22,000종 중에 ‘이롭다’, 혹은 ‘해롭다’ 라고 판별된 것은 5%밖에 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위에서 말했듯이 세상의 모든 만물은 하나의 근원적인 힘에 기초하여 수많은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 그런데 ‘이롭다’, 혹은 ‘해롭다’, 그것도 인간중심적인 해석에서 판별된 것이 5%밖에 되지 않는 상황에서 특정동식물을 멸종시키는 것은 이 거대 생태 네트워크 체제를 훼손시키는 행위다. 그런데 우리가 염려해야할 것은 생태 네트워크를 이루는 수많은 것들 중에 보다 더 근원적인 힘에 가까이 관계맺은 것, 소위 ‘주춧돌 종’이라고 하는 것이 파괴이다. 이 ‘주춧돌 종’은 위에서 말한 나비효과를 가장 크게 일으킬 수 있는 종이기 때문에 이 종의 멸절은 자칫하면 긴 시간의 누적 속의 찰나와 같은 ‘나’를 포함한 생태 네트워크를 거대한 나비효과에 의해 순식간에 파괴시킬 수도 있다. 따라서 긴 크로노스의 시간의 흐름에서 생명체로서의 ‘나’는 보다 카이로스적 행위로 열린욕망 안에서 관계 맺고 이를 통해 긍정적인 창발현상을 나타내고자 애써야한다.
위에서 지금까지 언급했던 것은 카이로스적 시간에서 ‘나’가 보다 넓게 관계맺고자 힘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생명체로서 ‘나’의 그물망을 넓히는 행위도 중요하지만 ‘나’의 그물망을 고치고 튼튼하게 하는 행위, 즉 질적인 행위 역시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나’의 그물망을 고치기 위해선 ‘나’와 가장 가까이 관계맺고 있는 것들을 열린 욕망으로 품어야한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모든 만물과의 관계를 넓혀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처음에 얘기하였듯이 모든 만물의 시간성, 즉 객관적인 흐름으로서의 크로노스적 시간은 내가 인지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따라서 ‘나’가 실질적이고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카이로스적 시간의 범주에서 행하는 일상에서의 실천이 생명체로서의 ‘나’에게 유의미한 시간이 될 것이다. 예수께서 가장 큰 계명의 하나로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라고 말씀하셨다. 카이로스적 시간에서 바라보았을 때, 내가 주체적으로 관계 맺음의 행위를 실천해 나갔을 때, 나에게 나비효과현상에 의해 기하급수적인 힘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가장 큰 개체는 나와 동떨어진 지구 반대편의 어떤 존재이기보다는 나의 가족, 나의 이웃이다.
생명체로서의 ‘나’는 유한하고, 전체적인 시간의 흐름에서 바라보았을 때, 내가 존재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기적이다. 그런데 기적과 같은 창발현상에 의해 현존하는 내가 이 짧은 찰나와 같은 삶을 보다 의미 있고 기적과 같이 살아나가기 위해선 위에서 언급한 카이로스적인 시간 안에서 열린 욕망의 관계성을 실천해나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생명체로서의 ‘나’의 삶의 의미를 유일하게 대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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