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조사] 노작(露雀) 홍사용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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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노작(露雀) 홍사용론
홍사용의 생애와 활동
노작 홍사용은 경기 용인군에서 대한제국 통정대부 육군헌병 부위를 지낸 아버지 홍철유와 어머니 이한식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9살에 부친이 사망하고 경기도 화성으로 이사를 가서 편모 슬하에 살게 된다. 그는 17세(1916)에 휘문의숙(徽文義塾)에 입학 할 때까지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으며 휘문의숙에 다니면서 학우인 정백(鄭栢),월탄(月灘)등과 함께『피는 꽃』을 펴낸다. 1919년 휘문의숙을 졸업, 기미독립운동 당시 학생운동에 가담하였다가 체포된 바 있다. 얼마 뒤 풀려나 귀향하여 정백(鄭栢)과 함께 수필<청산백운 靑山白雲>과 시<푸른 언덕 가으로>를 썼는데, 이 두 작품은 유고로 전해지다가 근래에 공개된 것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그의 최초의 작품이 되고 있다.
문단 활동으로는 1920년 『문우(文友)』를 발간하면서 시 커다란 집의 찬밤을 발표했다. 1922년부터 『백조』 동인으로 참여하여 시 백조는 흐르는데 별 하나 나 하나(1922), 나는 왕이로소이다(1923) 등을 발표함으로써 본격적인 시작 활동을 하여 ≪개벽≫·≪동명≫·≪여시≫·≪불교≫·≪삼천리≫·≪매일신보≫ 등에 많은 시·소설·희곡 작품을 발표하였다.〈백조는 흐르는데 별 하나 나 하나〉를 비롯하여 〈나는 왕(王)이로소이다>〈묘장〉〈그것은 모두 꿈이었지마는〉등 20여 편과, 민요시〈각시풀>〈붉은 시름〉등, 소설 〈저승길>〈뺑덕이네>〈봉화가 켜질 때>, 희곡〈할미꽃>〈출가>〈제석〉외에도 수필 및 평문이 있다.
극단 활동으로는 1923년 토월회(土月會)에 가담하여 문예부장을 맡은 것을 비롯하여 1927년 박진·이소연과 함께 산유화회(山有花會)를 조직하였다. 또 1930년 홍해성·최승일과 함께 신흥극장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그는 산유화회에서 자신의 희곡 향토심, 태자의 출가 등을 공연하며 연극 활동에 정열을 쏟기도 하였다. 1929년경부터 친구 박진의 집에서 기거하는 등 한동안 방랑생활을 하다가 돌아와 자하문 밖 세검정 근처에서 한약방을 경영하였다. 일제 강점기 후반에 대부분이라 할 만큼 많은 시인들이 친일 작품을 남기게 되는데, 홍사용은 이 시기에도 친일시를 창작하거나 친일 활동을 하지 않은 시인 중 한 명이다. 그 뒤 8·15광복을 맞아 근국청년단(槿國靑年團)운동에 가담하였으나 그 뜻을 펴지 못하고 1947년 지병인 폐환으로 사망하였다. 생존시에는 작품집이 나오지 않았고 1976년 유족들이 시와 산문을 모아 ≪나는 왕(王)이로소이다≫를 간행하였다.
홍사용의 작품세계
『백조』의 실질적인 주재였던 홍사용은 소설과 시, 수필의 다양한 장르에 걸쳐 발표하였다. 홍사용의 시문학은 크게 전기와 후기로 나눌 수 있는데 전기는 <백조>시대부터 1928년 까지로 볼 수 있고 후기는 그 이후에 해당한다. 그는 1928년 5월『별건곤』12,13호에「조선은 메나리나라」를 발표하면서 민요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그 이후에는 민요적 시와 시조를 발표하고 있다. 그러나 전기의 자유시 계열도 정서적으로는 민요적 시세계와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홍사용은 한국 근대시에 있어서 다수의 시인들처럼 자유시에서 민요시로, 서구적 취향에서 전통지향으로 변모해가는 동일한 궤적을 밟는다고 할 수 있다. 김은철, 『사회화의 관점에서 본 홍사용의 시』, 299p
홍사용을 한(恨)의 정서에서 우러나온 서정과 향토적 소재를 차용한 ‘민요시인’이라고 하는데, 그의 민요에 대한 관심은 일제 식민지 지배하에 있는 당시 사람들에게 민족 고유의 전통율에서 민족혼을 발견하게끔 하는 의도라 할 수 있다. 장석주 , 『20세기 한국문학의 탐험』, 시공사 , 2000 , 277p
1) 유년으로의 회향과 민족적 비애의 정서
노작의 초기 시는 낭만주의의 정서의 자유시 계열의 작품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대부분이 강한 감정의 자생적 분출에 의해 탄생된다. 그의 시에서 두드러져 보이는 눈물과 비탄의 정서가 그것이다. 신동욱은 “노작의 초기 시가 감정 분출의 꿈, 눈물과 같은 감상성을 보이지만, 현실에 바탕을 두고 그 무렵의 민족적인 어려움을 내면적 주제로 설정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의 이러한 정서는 국권 상실을 배경으로 한 겨례의 정서를 대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자세는 문예 운동에 가산을 탕진하고 죽을 때까지 일제에 협조하지 않은 전기적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또한 노작의 초기 시에 나타난 특징으로는 어머니와 관계된 유년의 동경의식이 강하게 작용한다. 노작의 어머니에 대한 동경은 가산의 탕진으로 인한 빈곤과 좌절감 3.1운동 참여로 인한 구속 등의 정신적인 외상이 작용하여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거기서 우슴석거불으는 자쟝노래는 다소히 어리인금 빗꿈터에 호랑나
뷔처럼 훨석나라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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