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작(露雀) 홍사용(洪思容) - 홍사용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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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노작(露雀) 홍사용(洪思容)
1. 홍사용의 생애
노작 홍사용은 경기 용인군 기흥면 농서리 용수골에서 대한제국 육군헌병부위를 지낸 아버지 홍철유(洪哲裕)와 한산 이씨 한식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경기 용인 및 화성일대에 많은 농토를 가진 지주였으므로 노작은 어린 시절을 남부럽지 않게 유족한 환경에서 자랐다. 그는 17세(1916)에 휘문의숙에 입학 할 때까지 집에서 한학을 배웠으며 휘문의숙에 다니면서 학우인 정백(鄭栢),월탄(月灘)등과 함께『피는 꽃』을 펴냈다. 그리고 졸업후 3.1독립운동 때에는 학생운동에 앞장섰다가 일경에 체포되었다가 풀려나 그해 6월에 고향에 돌아와 정백과 함께 현량개에 은신하며 수필과 시를 쓰고, 월탄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한다.
문단활동으로는 박종호 등과 함께 <문우(文友)를 창간하고, 재종형 홍사중(洪思中)과 함께 <백조>를 3호까지 간행하였다.
연극 활동에도 관심을 가져 1923년 근대극 운동의 극단인 <토월회>의 문예부장직을 맡았고, 직접 서양극 번역과 번안 그리고 연출까지 맡아 하였다. 1927년 박진과 함께 산유화회」를 조직했으며 1930년 홍해성과 함께 신흥극장을 조직하기도 했다. 1929년부터 친구 박진의 집에 기거하면서 방랑생활을 하다가 돌아와 1935년을 전후하여 한약방을 경영하기도 했다. 815해방 후 근국청년단(槿國靑年團)운동에 가담했고, 1947년에 폐환으로 사망했다. 유해는 향리인 경기도 화성군 동탄면 석우리에 안장되어 있다. 1976년 유족들이 시와 산문을 모아 <나는 왕이로소이다>를 간행하였다.
2. 작품 경향 - 이원적 시작활동
홍사용의 문학관은 전통지향적, 민족주의, 낭만적 세계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의 민요론인 「조선은 메나리나라」에서 그는 민족의 넋, 민족의 리듬을 추구하여 민족주의 이념을 구체적으로 표출하였다. 홍사용의 시작세계는 크게 전후의 두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기는 <백조>시대부터 1928년까지로 볼 수 있고 후기는 그 이후에 해당한다.
1) 전기 - 자유시 계열(낭만주의)
전기의 시들은 감상과 낭만을 기조로 한 애상과 향토성의 정서, 그리고 다분히 자전적인 것이기도 한 그 초기시의 특색, 즉 한국 낭만주의 시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전기시가 갖는 산문정신 지향과 확대지향성은 3·1운동의 실패로 인한 시대감정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자유시에 나타난 낭만성은 현실을 외면한 단순한 우울, 이상의 추구, 자연 찬미와 탐미적 경향만을 특징으로 하고 있지도 않다고 보아진다. 그의 낭만주의 정신은 민족의 보편적 정서 이면에 감추어진 삶의 고통과 현실을 부분적이나마 직시하면서 그러한 역사적 현실이 낳은 정신적 고뇌를 낭만적으로 승화시켜 현실을 재창조한다는 정신적 탄력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일제의 식민치하에 갇혀진 시대적 압력과 문학적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하는 건전하고 건강한 의식이 감지되기도 하는 것이다.
2) 후기 - 민요시 계열(민족주의)
1928년 5월 별건곤(別乾坤) 12,13호에 조선은 메나리나라」를 발표하면서 민요에 큰 관심을 보였고 이후에는 민요적 시와 시조를 발표하였다. 그가 물론 명백하게 자신의 민족의식을 표현한 공인된 민족주의 시인은 아니었으나, 그의 시가 당대 상황에 대한 참담한 민족감정을 노출시키고 있음은 또한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후기의 민요시에서는 우리 고유의 민요 사상과 율조를 바탕으로 한 민족관념으로 요약할 수 있다. 후기 민요시로의 전환은 민요의 본질을 계승하여 시대적 상실감을 극복하려는 주체적(主體的) 각성(覺醒)으로 그 회복의 정신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산문시부터 민요시로 형태상의 시적 전환에도 불구하고 홍사용의 시작에 일관하는 특색은 향토적 정서와 낭만적 정조라고 할 수 있다. 즉, 홍사용문학의 각 장르에 공통적으로 흐르는 문학의 특성은 민족주의, 민중의식, 낭만주의이다. 홍상용은 문학 활동을 통하여 식민지 한국의 해방을 갈망(渴望)하고, 민족적 혹은 공동체적 자각을 보여주고 있다.
3. 작품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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