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민란의 원인과 그 주도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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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19세기 민란의 원인과 그 주도층
- 향회와 요호층
목차
1. 서론
2. 향회와 요호층
2-1. 향회의 성립과 발전
2-2. 신흥세력으로서의 요호층
3. 민란의 원인 -삼정의 문란
4. 민란으로의 발전
5. 맺음말
1. 서론
제국주의의 침략을 받기이전의 한국사회는 중세의 해체라는 방향에서 주목할 수 있다. 겉으로는 기존의 관습과 성리학적 정치 운영 체제를 무너뜨리려고 하였고 안으로는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사상적 변화를 꾀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한사회가 변화하기위해서는 기존사회의 바탕이 되던 낡은 질서와 새로운 질서의 충동과정에서 이루어진다. 19세기의 이른바 홍경래의 난, 임술민란, 갑오농민항쟁 등은 그와 같은 과정 속에서 겪은 조선의 중세시대를 마무리 짓기 위한 항쟁들이 이었다.
1862년 한 해에 각 고을을 단위로 상호간 뚜렷한 연계도 없는 상황에서 연속적으로 40여 지방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났다. 적게는 수백에서 많게는 수만에 이르는 대중들이 집회를 열고 그들만의 요구조건을 내세우고 대중의 힘을 통해 그것들을 쟁취하거나 압제자에 대한 응징을 통해 그동안 쌓아 왔던 분을 풀었던 것이다. 이들 항쟁에 대해서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많은 연구와 실증자료들을 통해 그 동기와 원인 등을 규명하기 위해 많은 노력이 기울여 졌다. 그 결과 항쟁의 전체적인 윤곽이나 규모를 쉽게 살펴볼 수 있게 되었으며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일컬어지는 제도 운영상의 문제라고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구조적인 모순과 체제변동의 측면으로 파악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기본적인 의문은 그대로 남아있다. 1862년 항쟁은 그 정후에 발생한 1812년 홍경래의 난이나 1894년 의 갑오농민항쟁과 비교할 때 그 중심인물이나 조직이 뚜렷하게 나타나있지 않다. 그런데 어떻게 항쟁이 일시에 전국적 범위로 확대 될 수 있었을까? 또 한 이때의 항쟁에서 그 구성원과 지도자층이 막연히 불만을 누적해온 농민층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어떤 특정 집단이나 계층의 이익이 좀 더 직접적으로 작용하였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점이 든다. 이러한 측면에서 ‘향회(鄕會)’ 라는 것에 대해 주목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2. 향회와 요호층
1). 향회의 성립과 발전
조선중기 이래 지방민의 통제책으로 향약을 보급하고 향촌 지배층을 통제 질서내에 끌어들이기 위해 제한된 범위 안에서 관행적으로 이루어지던 향회는 조선사회의 선장과 정치적인 영역의 확대 그리고 제지사족의 성장에 따라 별도의 새로운 성격의 역사현상을 낳게 되었다. 효율적인 사회 통제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까지 민주자치가 필요하였고 기존 교화 위주의 향촌 통치체제에 변화를 가져오게 한 것이다. 따라서 전적으로 양반 지배층이 중심이던 향회에 일부 평민들까지도 참가하게 되었으며 처음에는 향회가 수령에 의해 단순히 여론 참작을 위한 기구 정도로서 구성되었지만 19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수령이 직무의 대부분을 향회의 논의와 동의하에 수행해야 할 만큼 역할과 기능이 다양해졌다. 임술년의 난 이전에 향회는 이미 그만큼 단순한 집합이나 혹은 이용이나 당하는 보조적 성격을 벗어나 내적으로 실질적인 조직과 결속력을 갖추고 있었으며 지방 사회의 성장한 힘이 안으로 결집되어 형성된 자치적 조직이었다. 이러한 향회를 중심으로 피지배층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한 저항과 권리신장을 위한 운동이 끊임없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리고 당분간은 체제 안에서 일종의 합법적인 운동을 전개하였지만 미구에 설정된 장벽을 무너뜨리고 적극적인 항쟁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전환점을 맞이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바로 임술년의 난은 이러한 과정 속에서 발생하게 된 것 이였다. 후기에 와서 향회가 피지배층의 저항을 위한 매개체가 되는 것에 대해서는 상이한 두 가지 측면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우선 위에 언급한 기존향회가 전이된 면과 다르게는 향회라는 명칭만 같을 뿐 전적으로 별개의 것인 역사적 산물로서 새로운 민(民) 의 자치기구라는 측면이다. 기존 향회에서일부 그 기능이 달라졌다고 한다면 이점은 바로 사회가 변했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실상 전통적인 향회 안에서도 변하는 역사를 수용할 수 있는 여지는 있었다. 이제조선사회의 성장과 정치적인 영역의 확대 그리고 피지배층의 성장에 따라 별개의 새로운 역사현상이 초래 되었다. 이는 지방사회의 자치영역이 윤리적인 측면만이 아닌 부세의 수취에까지 확대되어야 했던 조건에서 어쩔 수 없었던 변화였다. 이러한 맥락에서볼때 18세기 후반부터 기록에 빈번이 등장하는 향회는 조선사회가 달라지는 데서 나온 새로운 역사현상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향회는 더 이상 어느 특정기관이나 계층의 이기을 위해 존재할 수 없고 전 주민의 이해와 관련되면서 다수의 이기, 나아가 민인(民人)의 공감위에 공의(公議)로 운영하게 되었다.
2). 신흥세력으로서의 요호층
향회의 기능이 앞에 설명한 바처럼 된 데는 그 구성원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았다. 기존의 교화 위주의 향회였을 때와는 모이는 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그 목적에 합당한 인물들이 참여하여야 했다. 그들은 수취의 대부분을 담당해야 하는 피지배층 일반이였다. 평민이나 양반이라는 구분없이 조세 부담을 많이 지게 되는 자들이 근간을 이루었는데 이들이 바로 ‘요호’라고 지칭되는 사람들이였다. 19세기에는 이 요호들이 사회적 지휘를 확보하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지방의 관리라고 할 수 있는 향임 직에 적극 진출 하였다. 이들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향회 구성원들은 기본적으로 조선의 중세적 질서와 이해관계를 같이 할 수 없는 층이었다. 따라서 이들 가운데 일부가 그러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중세권력과 대립하고 저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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