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림(石林) 신동엽론 - 시적 세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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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석림(石林) 신동엽론
1. 생애
1930년 8월 18일, 신동엽은 충남 부여읍 동남리의 농가에서 부친 신연순과 모친 김영희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30년대 식민지 수탈구조가 가져오는 가뭄과 굶주림의 시대 속에서 가난한 유년기를 보냈다. 1937년 신동엽은 부여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수재로서의 면모를 보이는데, 이 당시 어린 그에게 큰 영향을 준 사람은 6학년 담임 김종익과 이복 누나인 신동희이다. 진보적 교사인 김종익과의 만남으로 가난을 사회적 현상으로 파악하는 시선을 가지게 되었고, 이복 누나를 통해 사랑과 연민의 시선을 배울 수 있었다. 이 두 요소는 후에 그의 시세계를 형성하는데 중요하게 작용한다.
1943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전주 사범학교로 진학한다. 재학 초기의 그는 조용히 학교를 다니며 많은 도서를 탐독하였는데, 특히 크로포트킨의 무정부주의 아나키즘(anarchism), 자유연합주의라고도 불린다. 이는 모든 형태의 권력과 강제를 부정하고 개인의 자유와 상호간의 연대를 근본 원리로 하는 사상이다.
에 관심을 가졌다. 그가 1학년에 재학 중 해방을 맞는데, 이 후 남북이 분단되고 좌익과 우익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어디에도 편향되지 않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좌익과 우익진영 학생들에게 린치를 당하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무정부적인 의식의 심화로 현실과 이데올로기에 강한 저항의식을 갖게 된다.
1949년 그는 단국대 사학과에 입학하게 되는데 이것은 그의 고향 부여에서 얻은 백제정신과 한반도의 역사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인민군 치하에서 부역행위도 하고 국민방위군에 징집되는 등 전쟁의 아픔을 겪다가, 고향을 찾아가던 중 날게를 씹어먹고 죽음의 원인이 되는 간디스토마에 감염되었다. 이로 인해 부여에서 요양 중 구상회란 친구를 얻게 되고, 둘은 문학적으로 학문적으로 많은 것을 공유하고 함께 공주의 동혈산, 우금치, 곰나루 등 동학농민운동의 발원지를 돌며 전쟁 전에 가진 역사적 인식에 대한 깊이 있는 사고를 하게 된다. 1953년에 서울로 상경하여 헌책방을 운영하며 인병선과 만나 교제 후 결혼하게 되며 집안이 가난한지라 충남으로 내려와 교편을 잡았지만 디스토마의 재발병으로 요양차 사임하고, 본격적으로 문학활동을 하게 된다.
1959년에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가 입선으로 등단하였으나, 20여행이 심사위원들에 의해서 삭제되어 발표되고, 같은해 3월에 발표한 ‘진달래 산천’이 용공성 공산주의의 주장을 받아들이거나 그 정책에 동조하는 성질을 뜻한다.
시비에 휘말렸다. 이로 인해 한동안 실의에 빠져 8개월 뒤에 발표하는 ‘새로 열리는 땅’, ‘향아’ 등에서는 현실 비판의 의지가 잘 드러나지 않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1960년 교육평론사에 취직한 그는 4.19 4·19 혁명(1960): 1960.3.15 제 4대 정 부통령을 선출하기 위해 실시된 선거에서 자유당은 부정선거를 자행하였다. 그러자 같은 날 마산에서 시민들과 학생들이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고 당국은 총격과 폭력으로 강제 진압에 나섰다. 이후 1960.4.11 1차 마산시위에서 실종되었던 김주열군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참혹한 시체로 발견됨으로써 이에 분노한 시민들의 제 2차 시위가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1960.4.18 고려대학교의 4천여 학생은 선언문을 낭독하고 국회의사당까지 진출 후 학교로 돌아가던 중 괴청년들의 습격을 받아 일부가 피를 흘리며 크게 부상당했다. 이에 분노한 전국의 시민과 학생이 다음날인 1960.4.19 총 궐기하여 독재정권 타도를 위한 혁명적 투쟁으로 발전, 독재정권은 총칼을 앞세운 무력으로 탄압하고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였다. 1960.4.25 독재정권의 만행에 분노한 서울시내 각 대학 교수단 300여명은 선언문을 채택하고 학생, 시민들과 시위에 동참하였고 1960.4.26 전날에 이어 서울 시내를 가득 메운 대규모의 시위군중은 무력에도 굽히지 않고 더욱 완강하게 투쟁하여 결국 이승만과 자유당정권의 장기집권을 종식시키고, 제2공화국의 출범을 보게 한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다.
혁명을 경험하면서 민중의 힘과 정의를 확인하였고, 그리하여 4.19 혁명을 찬양하는 시 ‘아사녀’를 쓰고 ‘학생혁명시집’을 간행하였다.
1961년 그는 교육평론사를 떠나 안정적인 직장인 명성여고 국어교사로 취직하면서 시작(詩作)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였다. 이 곳에서 그는 1969년 타계할 때까지 근무하게 된다. 같은 해(1961)에 발표된 산문 ‘시인정신론’에서 정신주의적, 추상적, 관념적 성향을 보이는데, 이것은 5.16 5·16 군사정변(1961): 5·16군사정변은 당시의 정치·사회적 문제와 군(軍) 내부의 문제라는 두 가지 배경을 갖는다. 정치권은 집권당인 민주당이 신 ·구파간의 갈등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다양한 사회세력들은 각각의 정치적 요구를 주장하여 정국은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특히 혁신계 정치세력의 부상과 학생세력의 진출은 민족자주화운동, 통일촉진운동으로 전개되어 반공분단국가의 근본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6 ·25전쟁 이후 한국사회에서의 사회적 지위 신장과 더불어 권력에 대한 욕구가 충만되어 있던 군부 내에서는 육사 8기생을 중심으로 고급 장성의 부정부패와 승진의 적체현상을 공격하는 ‘하극상사건(下剋上事件)’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소장 박정희와 중령 김종필을 중심으로 한 8기생들은 1960년 9월 쿠데타를 모의하였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제2군 부사령관인 소장 박정희와 8기생 주도세력은 장교 250여 명 및 사병 3,500여 명과 함께 한강을 건너 서울의 주요기관을 점령하였고, 무력으로 제 2공화국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들은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여 전권을 장악하면서 군사혁명의 성공과 6개항의 ‘혁명공약’을 발표하였고, 군사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재편하여 3년간의 군정통치에 착수하였다. 이후 1963년 말 대통령선거, 국회의원선거를 승리로 이끌고 정식으로 제3공화국을 출범시킨다. 이 사건은 국가 주도의 급속한 경제발전으로 긍정적 평가를 받기도 하나, 군사문화의 사회확산, 군의 탈법적 정치개입의 선례를 남겼으며, 민주적 정권교체의 지연, 산업화의 지역 ·계층간 불균형 등의 부정적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쿠데타 경험하면서 더욱 짙어졌다. 하지만 1964년 6.3사태 6·3사태(1964): 1964년 6월 3일, 서울시 전역에서 1만여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박정희 정부가 추진한 한일회담에 대한 반대시위를 하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여 시위를 진압한 사건이다. 1964년 3월 24일 서울·연세·고려대학교 등에서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를 주장하며 시위한 것을 시작으로 전국으로 확산되었으며, 정부가 이를 수렴하지 않자 학생에 시민들까지 시위에 가세하게 되었다. 이에 박정희는 오후 8시 서울시 전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4개 사단병력을 서울 시내에 투입하여 3개월가량 계속되던 시위를 진정시켰다. 7월 29일 계엄이 해제될 때까지 일체의 옥내외 집회·시위의 금지, 대학의 휴교, 언론·출판·보도의 사전검열, 영장 없는 압수·수색·체포·구금, 통행금지시간 연장 등의 조치가 취해졌다.
를 계기로 구체적 현실인식을 바탕으로한 현실적이며 참여지향적인 작품을 짓는다. 1965년 그는 한일협정 비준반대 문인서명운동에 참여하여 실천적으로 활동하며, ‘3월’, ‘발’ 등의 작품을 발표하여 동학혁명, 419혁명과 현실을 대비하는 의식을 보인다. 그리고 1967년 신구문화사에서 발행된 ‘52인 시집’ 에 ‘껍데기는 가라’, ‘3월’, ‘원추리’ 등 7편의 시를 실었는데, 그 중 신작인 ‘껍데기는 가라’는 한국 현대시사에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그해 12월에 그의 문학 결정판이라 평가받는 서사시 ‘금강’을 발표, 60년대 참여시인의 상징이 되었다. 이후 분단 극복, 평화 통일에 대한 염원을 주제로 한 다양한 작품을 생산하고 1969년 4월 7일 간암으로 39세의 젋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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