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공찬전」을 읽고 - 침묵과 나약함은 인간의 생존전략이 아니다 자신의 무기로 의지를 길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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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학개설>
「설공찬전」을 읽고
- 침묵과 나약함은 인간의 생존전략이 아니다
자신의 무기로 의지를 길러라! -
어느새 끝맺음을 하고 있는 2009년. 다가오는 2010년, 2011년, 2012년……. 해가 더해갈수록 우리 사회는 창의적이고도 능동적인 인간을 선호하고 필요로 하며 또한 그런 인간을 길러내기 위해 교육과정을 조직하고 그것을 토대로 학생들을 교육하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의 이런 노력은 부정적인 의미로 자리 잡은 교육열과 입시제도 등의 문제로 인해 실제 학교현장에서의 창의적인 활동을 하는 것이 어려우며, 나아가 창의적이고 능동적인 인재육성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1968년 Philip Jackson이 쓴 『아동의 교실 생활』(Life in Classrooms)에서 그는 아동이 잠재적으로 은연중에 ‘침묵’이라는 생존전략을 터득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의 수업 풍경을 생각해봐도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할 수 있는 말이다. 즉, 이러한 학생들이 사회인이 되고 또 다른 학생들이 생겨나고 다시 이 학생들이 사회인이 되고 또 다시 학생들이 생겨나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우리 사회가 의도한 바와는 다르게 점점 수동적이고 나약한 인간들이 생겨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러한 유형의 인간들이 비단 현대인들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바로 <설공찬전>에서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설공찬전>이 보여주는 “저승경험담을 통한 현실비판”이라는 주제를 보았을 때 이 소설에서 나약한 모습의 인간상을 끌어낼 수 있을까하는 의문을 품을 수도 있지만 조금 다른 시각에서 보았을 때, 다른 인물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또는 다른 세계를 통해 보았을 때, <설공찬전>에는 나약한 인간들이 등장하며 그들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그래서 어떤 방법을 통해 구원 받으려고 하는지를 쉽게 찾아 볼 수 있었다.
누구나 한번쯤은 ‘기가 약하면 가위에 잘 눌린다’라는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몸이 아프거나 피곤하여 기가 약해지면 가위에 잘 눌리게 된다는 의미로 미신처럼 전해지는 말인데, <설공찬전>의 설공침도 이 미신에 해당되는 사람 중에 한 명이 아닌가 싶다. 혼령이 된 설공찬은 자신이 저승에서 겪었던 일을 말해주기 위해 설공침의 몸을 빌려 빙의하게 되는데 소설의 어느 부분을 읽어보아도 왜 하필 설공침의 몸에 들어가게 되었는지에 대한 연유는 나타나있지 않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공침의 기가 약하여 그를 선택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공침의 경우 몸이 아프다거나 피곤해서가 아니라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거나 신경 쓰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기가 약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 역시 소설에는 나오지 않기 때문에 그의 몸이 아팠는지에 대한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게 하는 단서는 작품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공찬의 집안은 지극한 가문으로서 부유하였고 공찬은 어릴 때부터 글공부하기를 즐겨 한문과 문장 작법을 매우 즐겨 읽고 글쓰기를 아주 잘하였다. 또한 공침의 동생 업동이와 비교하였을 때 공침은 젊었을 때부터 글을 힘써 배웠으나 동생의 반만도 못하고 글쓰기도 그만 못하였다. 더군다나 그는 장남이었기 때문에 그가 지게 되는 책임이 막중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공찬과 업동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며 자신이 그들보다 못하다는 생각에 열등감을 느끼고 피해의식까지 느꼈을지도 모른다. 공찬에게는 이런 공침이 기가 약하고 나약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공찬은 공침에게 빙의했다고 생각한다.
공침은 이렇게 약한 정신력을 가진 인물로 나타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몸에 빙의된 공찬과 대립하는 과정에서도 의지박약한 모습을 보여준다. 공찬이 몸에 들어온 때에는 그의 마음대로 할 수 없기 때문에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할지라도 공찬이 몸에 들어오지 않았을 때에도 언제쯤 들어올까 하는 걱정에 늘 불안해하며 시름시름 앓는 아주 무기력한 상태로 어떤 방어도 하려고 하지 않는다. 또한 그는 소설의 마지막에서 “나는 병들어 죽을 것이다”라는 절망적인 말을 하고 있는데 바로 이러한 모습들이 현대인들의 모습과 아주 유사하다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를 보면 그를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는 사람은 공침 자신이 아닌 공침의 아버지이다. 요즘의 사회를 둘러보아도 이러한 광경은 쉽게 볼 수 있다. 부모는 자신의 자녀들을 그저 따뜻한 온실 속의 화초처럼 키우고 힘든 일을 시키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그 아이들은 어려서도 어른이 되어서도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부모들은 그 과정에서 아이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커주길 바라고 또 그렇게 될 수 있도록 키운다. 이러한 까닭에 아이들은 그저 집에서는 부모가 시키는 대로 학교에서는 교사가 시키는 대로 사회에서는 상사가 시키는 대로 행동하며 우리 사회에 적응하게 되고 이것이 현대 우리 사회에 무기력한 인간들을 낳게 된 셈이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 공침은 쉽게 “죽을 것이다”라는 말은 내뱉는다. 물론 공침이 죽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는 나와 있지 않지만 이 또한 현대인과 결부시켜 보았을 때 현대인들은 때때로 죽음을 너무나도 쉽게 생각하고 나아가 죽음을 선택하는 비극에까지 이르게 된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OECD평균보다도 훨씬 높은 수치로 다른 국가들에 비해 독보적이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개인주의 현상이 팽배한 편인데 이러한 사회 구조 속에서 경쟁과 1등이어야만 한다는 압박감의 채찍이 더해져 인간들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 같다. 최고의 자리를 향해 달리는 과정에서 그들은 도달할 수 없다는 현실에 좌절하고 무기력함을 느끼고 자신들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여 점점 지쳐가기 때문이다. 사실, 그들 주변에는 그들을 응원해주고 위로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을 것인데 아주 극한 상황에 치닫자 오직 죽음만이 자신을 구원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하는 것이다. “자살”이라는 것이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최후의 자유라는 말도 있지만 그런 최후의 선택을 생각할 수밖에 없게 한 사회도 큰 문제이기는 하다. 하지만 인간이 죽고 사는 것은 그 사람의 의지에 달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흔히들 자살한 사람들을 보고 자살도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는 한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그 말은 곧, 그렇게 죽을 용기가 있다면 그 용기로 남은 인생을 살아갈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공침이 공찬에게 대응해보기 위하여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었던 것을 비판하여, 인간은 더 이상 무기력하고 무조건 수긍만 하는 존재가 아닌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에 불만이 있다면 능동적으로 대응해보고 싸워보는 존재로서 삶에 대한 의지를 키우고 자신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고 주체적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했듯이, 아주 극한 상황에 치닫게 된 인간은 자신을 구원해 줄 수 있는 방법 중에 하나로 죽음을 선택하게 된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고 하듯이 우리는 그들이 왜 죽음을 선택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현세를 염세적으로 생각하다 문득 죽음의 세계에서는 그들이 편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라 추측 할 뿐이다. 이러한 현상 또한 <설공찬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설공찬전>에서는 특별히 죽음을 선택했다고 하기 보다는 죽음의 세계, 즉 내세적 삶에서 구원받기를 바랐던 것 같다. 당시의 사람들도 내세적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고 인간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을 그 곳에서는 해결해 줄 수 있다고 믿었다는 것인데, 절에 공양을 드리거나, 매일 밤 장독대에 물그릇을 올려놓고 기도를 드리거나, 조상 혹은 자신이 믿는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모습들을 보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주장이다. 공찬이 말하기를, “이승에서 비록 비명에 죽었어도 임금께 충성하여 간하다가 죽은 사람이면 저승에 가서도 좋은 벼슬을 하고, 비록 여기에서 임금을 하였더라도 주전충 같은 반역자는 다 지옥에 들어가 있었다, 적선을 많이 한 사람이면 이승에서 비록 천하게 다니다가도 저승에서는 가장 품계 높이 다닌다. 서럽게 살지 않고 여기에서 비록 존귀하게 다니다가도 악을 쌓으면 저승에 가도 수고롭고 불쌍하게 다닌다.”고 하였다. 이것은 곧 저승은 정의롭고 정당한 살기 좋은 곳이라는 의미를 내보이며 사람들이 저승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하는 말이다.
바로 작가는 사람들이 저승세계를 믿는다는 것과 저승세계는 살기에 좋다는 것을 결부시켜 ‘설공찬’이라는 영웅과 같은 존재를 내세워 사회를 바꿔보려고 한 것은 아닌가 싶다. 물론 ‘설공찬’은 이미 죽은 사람이기 때문에 세상을 직접적으로 변화시킬 수는 없으므로 영웅이라고 보기 보다는 인간이 사회 문제를 볼 수 있고 또 그러한 문제들을 해결해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조력자라고 볼 수 있겠다. 어찌됐든, 작가는 인간은 스스로 세상을 변화시키기에는 힘이 부족하다고 여기고 하늘에서 계시가 내려져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수동적인 존재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누군가 그들에게 조언을 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러한 인간들은 내세적 세계를 신뢰하였으므로 ‘설공찬’이라는 죽은 인물과 그가 털어놓는 저승경험담을 내세운 것이다. 즉, 작가는 내세적 삶에 대하여 구원 요청을 한 것이고 사람들이 그 속에서 비판하고 있는 현실의 문제를 자각하고 더 나아가서는 옳은 방향으로 행동하게 되는 등 비로소 내세적 세계를 통해서라도 사회를 개혁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의지를 가질 수 있도록 도움을 받았으면 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인간의 나약함을 주제로 하여 글을 써내려 왔는데 예나 지금이나 발 벗고 나설 수 있는 사람, 특히나 어려운 일에 뛰어들 수 있는 사람은 드문 것 같아서 많이 안타까웠다. 우리 사회가 조금 더 긍정적이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모든 일에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이 아니라 내 일처럼 행동하며 관심 갖고 빅뱅의 저서 제목인 “세상에 너를 소리쳐!”와 같이 조금만 당당하게 내 목소리를 낸다면 언제 어디서나 내세울 수 있는 깨끗하고 당당한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부제에서도 말하고 있지만 침묵이라는 것은 더 이상 인간의 생존전략이 될 수 없으며 사회와 타협하는 것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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