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사상] 일본양명학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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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들어가며
2.양명학의 전래와 일본 양명학의 계보
3.일본 양명학 전개의 개략-中江藤樹에서 大鹽中齋까지-
결론
참고 문헌

본문내용
1. 들어가며
양명학에 관한 논문,「일본 양명학의 전개-중강등수에서 대염중재까지」에서는 일본 양명학을 개략적으로 소개하며 양명학의 시조인 나카에 도쥬(中江藤樹)에서 쿠마자와 반잔(熊澤蕃山) 그리고 오오시오 츄사이(大鹽中齋)까지 주요 양명학자들에 대해 한정 서술하고 있다.
이하에서는 논문에서 언급하는 양명학의 전래와 일본 양명학의 계보와 대표 사상가들, 일본 양명학 전개의 개략 등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2.양명학의 전래와 일본 양명학의 계보
일본의 양명학은 나카에 도주(中江藤樹)를 일본 양명학의 시조로 하고, 이후의 쿠마자와 반잔(熊澤蕃山)·미와 싯사이(三輪執齋)·사토 잇사이(佐藤一齊)·오오시오 츄사이(大鹽中齋)로 이어지는 계보를 "일본 양명학파의 철학"으로서 통일적으로 그려내고 있다.1) 그 이후 이러한 계보는 일본 양명학파의 계보를 더듬는 경우에 하나의 상식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계보 만들기를 가장 먼저 행한 사람으로서는 오오시오츄사이(大鹽中齋)를 들어야 한다. 즉, 그는 "이 땅에서 도쥬(藤樹)·반잔(蕃山) 두 선생 및 미와(三輪)씨 이후로 칸사이(關西) 쪽에서는 양지(良知)의 학문이 이미 끊어졌다"2)고 말하여 일본 양명학을 계통지었으며, 또 "선생(=도쥬)은 이 땅에서 양명학의 개종이다"라고 하여 도쥬를 일본 양명학의 시조로 내세우고 있다. 따라서 이노우에 테쯔지로오의 관점도 결국은 츄사이의 그것을 거의 답습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가 있다.
참고문헌
최재목, 「일본 양명학의 전개 -중강등수에서 대염중재까지-」, 한국양명학회 『양명학』 1997
최재목, 「공허의 실학」
나가오 다케시, 『일본 사상 이야기40』, 예문서원,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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