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정권의 수립과 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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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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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신정변의 원인
(1) 간접적 요인
(2) 직접적 요인
2. 무신의 반란(무신정변)
(1) 정권 장악
(2) 초기 무신 집권 세력 타도 운동
3. 무인 사이의 정권쟁탈
4. 최충헌의 집권
5. 농민․노비의 봉기
(1) 민란의 발생
(2) 민란의 발전
6. 최씨 무신정권
(1) 사병
(2) 지배기구
7. 몽고와의 항쟁
(1) 전개
(2) 농민․천민의 동향
(3) 무신정권의 몰락
8. 무인정권시대의 문화
(1) 문학
(2) 불교
참고문헌
- 본문내용
-
2. 무신의 반란(무신정변)
(1) 정권 장악
- 의종 24년(1170) : 정중부․이의방․이고의 주도 정중부가 소변을 보러 나가니 견룡 행수(牽龍行首) 산원(散員) 이의방(李義方)과 이고(李高)가 따라 나와서 귀엣말로 말하기를 “문관들은 의기양양하여 취하도록 마시고 배부르도록 먹고 있는데 무관들은 굶주려 피로해졌으니 이래서야 어찌 참을 수 있는가!”라고 하니 정중부도 수염을 태운 악감이 있는지라 “그렇다!”라고 하고는 드디어 반역의 흉모를 꾸몄다. 《고려사》 제128권 - 열전 제41 > 반역 2 > 정중부
→ 한뢰 등 문신들 살육 황혼이 깃들여 일행이 보현원에 접근하였을 때 이고와 이의방이 먼저 가서 왕의 명령이라 속이고 순검 군사 를 모아 두었다. 그리고 왕이 문에 들어가고 모든 신하들이 물러나올 때 이고 등이 직접 임종식과 이복기를 문에서 죽였다. 이때 한뢰는 친근한 환자의 힘을 입어 어상(御床) 아래로 숨어 들어가니 임금이 대경하여 환자 왕광취(王光就)로 하여금 제지하게 하였다. 정중부가 말하기를 “화근 한뢰가 아직 임금 곁에 있으니 내보내서 죽이게 하라!”라고 하였으며 내시 배윤재(裵允材)도 또한 들어가서 왕에게 내보낼 것을 청하였으나 한뢰가 왕의 옷에 매달려 나오지 않았으므로 이고가 칼을 뽑아 위협하니 그제야 나왔는데 즉석에서 죽였다.
《고려사》 제128권 - 열전 제41 > 반역 2 > 정중부
- 궁궐 장악 → 남아있던 문신들 대부분 제거 이고, 이의방, 이소응 등은 곧바로 서울까지 달려가서 가구소(街衢所)에 이르러 별감 김수장(金守藏) 등을 죽 이고 대궐로 들어가서 추밀원 부사 양순정(梁純精), 사천감 음중인(陰仲寅), 대부소경(大府少卿) 박보균(朴甫均), 감찰 어사 최동식(崔東軾), 내시 지후 김광(金光)을 비롯한 내직원(內直員) 등을 잡아 죽였다. 또 순검군(巡檢軍)을 인솔하고 그 밤으로 태자궁(太子宮)으로 가서 행군 별감 김거실(金居實), 원외랑 이인보(李仁甫) 등을 죽이고 천동택(泉洞宅)으로 침입하여 별상원(別常員) 10여 명을 죽였다.
《고려사》 제128권 - 열전 제41 > 반역 2 > 정중부
- 의종 폐위와 명종 옹립 기묘일에 왕은 홀몸으로 떠나서 거제현(巨濟縣)으로 피해갔으며 태자는 진도현(珍島縣)으로 추방되었다. 이날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왕의 아우인 익양공(翼陽公) 왕호(王晧)를 맞아다가 왕위에 앉혔다. 《고려사》 제19권 - 세가 제19 > 의종 3 > 의종 경인 24년(1170)
(2) 초기 무신 집권 세력 타도 운동
① 김보당의 난(1173)
- 의종 복귀운동 경진일에 동북면 병마사 간의대부 김보당(金甫當)이 동계(東界)에서 군사를 발동하여 정중부(鄭仲夫), 이의방(李義方) 등을 토벌하고 전왕(의종)을 복위(復位)시키려 하니 동북면 지 병마사 한언국(韓彦國)이 군사를 데리고 이에 호응하였으며 장순석(張純錫) 등을 거제(巨濟)로 보내 전왕을 모셔다가 계림에 있게 하였다.
《고려사》 제19권 - 세가 제19 > 명종 1 > 명종 계사 3년 (1173)
→ 실패 → 많은 문신들 학살 당초에 김보당이 거사를 계획할 때 내시 진의광(陳義光), 배윤재(裴允材)가 그것을 알고 있었는데 김보당이 죽을 무렵에 허튼 말로 이르기를 “문관치고 누가 공모치 않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무차별하게 학살하거나 또는 강물 속에 집어넣어서 약 10일간에 문사(文士)는 남기지 않고 다 죽였다. 이리하여 온 나라의 인심이 흉흉하고 앞날에 대한 불안에 휩쓸렸다. 《고려사》 제128권 - 열전 제41 > 반역 2 > 정중부
, 의종 시해 동 10월 경신일에 이의민(李義旼)이 곤원사(坤元寺)의 북쪽 연못가에서 왕을 죽였다.
《고려사》 제19권 - 세가 제19 > 의종 3 > 의종 경인 24년(1170)
② 조위총의 난 서경(西京) 유수(留守) 조위총(趙位寵)이 군사를 발동하여 정중부, 이의방 등을 치면서 동북(東北) 양계(兩界)의 여러 고을에 격문(檄文)을 보내 궐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고려사》 제19권 - 세가 제19 > 명종 1 > 명종 갑오 4년 (1174)
(1174)
- 2년 가까이 항전 → 실패 윤인첨(尹鱗瞻)이 서경을 격파하고 조위총(趙位寵)을 붙잡아 죽인 다음 사람을 조정에 보내 승전을 보고하였다. 《고려사》 제19권 - 세가 제19 > 명종 1 > 명종 병신 6년 (1176)
⇒ 모든 반란 억제 : 정권은 문신에서 무신에게로 이동
3. 무인 사이의 정권쟁탈
- 중방 그때 모든 무관이 중방(重房)에 회합하고 문관으로서 살아 있는 사람들을 전부 불렀다. 이고가 그들을 모조리 죽이고자 하였으나 정중부가 제지하였다. 《고려사》 제128권 - 열전 제41 > 반역 2 > 정중부
이 중심, 고위부터 하위까지 모두 독차지 → 실력의 세상 → 잦은 정권 교체
- 20여 년간 5번의 집권 세력 교체 : 정중부․이의방․이고의 공동 정권 → 이의방은 평소에 이고가 자기에 대하여 억압함을 미워하여 왔던바 이때에 와서 채원과 함께 이고 등이 궁문 밖에 오기를 기다려 그 자리에서 철퇴로 때려 죽이고 순검군(巡檢軍)을 풀어서 이고의 모친과 그 도당을 모두 잡아 죽였으나 그 부친만은 평소에 이고의 불초(不肖)함을 미워해서 자식으로 생각지 않았으므로 귀양만 보냈다. 《고려사》 제128권 - 열전 제41 > 반역 2 > 이의방
이의방 이의방이 좌승선(左承宣)으로 되고 그의 딸이 태자비(太子妃)가 되었다. --(중략)-- 이의방은 딸이 태자비로 된 후 더욱 기세를 남용하고 국정을 문란케 하였다. 《고려사》 제128권 - 열전 제41 > 반역 2 > 이의방
→ 이의방이 마침 선의문 밖으로 나갔는데 정중부의 아들 정균의 꼬임을 받아서 중 종감 등이 신소할 일이 있다고 핑계하고 이의방의 뒤를 따라가다가 틈을 엿보아 목을 쳐죽였다. 그리고 각처로 나뉘어서 이준의 형제와 그의 도당 고득원(高得元), 유윤원(柳允元)등을 체포하여 모두 다 죽였으며 또 중들이 적신(賊臣)의 딸이 태자비로 될 수 없다고 왕에게 청원해서 쫓아 냈다. 6년에 이의방의 문객들인 장군 이영령(李永齡), 별장 고득시(高得時), 대정(隊正) 돈장(敦章) 등이 이의방을 위해서 복수하고자 정중부를 암살하려고 음모하다가 일이 누설되어 중방에서 이영령 등을 체포하여 먼 섬으로 추방했다.
《고려사》 제128권 - 열전 제41 > 반역 2 > 이의방
정중부 시중(侍中)이 되어서 전원(田園)을 광범하게 설치하였으며 사환꾼과 문객(門客)들이 그 세를 믿고 횡포 방자하게 굴었으므로 온 나라가 고통을 받았다. 《고려사》 제128권 - 열전 제41 > 반역 2 > 정중부
→ 장군 경대승(慶大升)은 평소부터 정중부의 소행에 대하여 분노하였으며 또 정균이 은밀히 공주(公主)를 처로 삼을 마음을 품고 있었으므로 임금도 걱정하고 있었다. 경대승이 그를 제거하기 위해 전심 전력하다가 마침내 정균을 죽이고 나서는 금군(禁軍)을 나누어 파견하여 정중부, 송유인, 유인의 아들 장군 송군수(群秀)를 체포케 했는데 정중부 등이 정변이 발생한 것을 알고 도망가서 은닉하고 있었으나 모두 체포한 후 죽여서 저자에 효수(梟首)하였더니 일국이 모두 크게 기뻐하였다. 《고려사》 제128권 - 열전 제41 > 반역 2 > 정중부
경대승 경대승이 겁이 나서 결사대 백 수십 명을 모집하여 집 안에 두고 불의의 사변에 대비케 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도방(都房)이라고 불렀으며 긴 베개와 큰 이불을 만들어 주고 주야 교대로 일 숙직을 하라 하였으며 혹은 자기도 그들과 한 이불 속에서 자면서 성의를 보였다. --(중략)-- 그런 까닭으로 많은 사람들이 아부했지만, 학식이나 용맹 혹은 지략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경대승이 다 물리치니, 무반들이 다들 그 위세를 두려워해 감히 방자하게 굴지 못하였다. 《고려사》 제100권 - 열전 제13 > 경대승
→ 13년(1183년)에 경대승이 홀연 꿈에 정중부가 칼을 들고 호통치며 달려드는 것을 본 후에 병을 얻어 죽었다. 그의 나이 30세였는데 그의 장례식에는 길가에서 통곡 아니 하는 사람이 없었다.
《고려사》 제100권 - 열전 제13 > 경대승
왕이 그가 반란을 꾸밀까 두려워서 병부상서 벼슬을 주고 중사(中使)를 시켜서 간곡히 타일렀더니 그제야 돌아왔다. 왕은 그를 편전(便殿)으로 불러서 접견하였다. 왕은 실상 내심으로는 무섭게 여기고 꺼리었으나 외면으로는 은총을 표시하니 온 나라가 임금의 유약함을 개탄했다. 왕은 그 후 곧 이의민에게 수사공 좌복야(守司空左僕射) 벼슬을 더 주었다. 《고려사》 제128권 - 열전 제41 > 반역 2 > 이의민
이의민 4년에 이의민을 공신으로 책봉했는데 양부(兩府)의 문무백관이 모두 다 그 집으로 와서 축하를 드렸다. 이의민이 전주(銓注)를 독단으로 처결하면서부터 누구든 재물만 가지면 무슨 벼슬이나 다 할 수 있었으며 그 도당이 널리 뻗쳐 있었으므로 조정 신하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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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이기백, 한국사신론, 일조각, 2009
․ 이기백 민현구, 「사료로 본 한국문화사 고려편」, 일지사, 2007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18 - 고려 무신정권, 2003
⋅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국역 고려사 22 - 列傳 3, 도서출판 민족문화
⋅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국역 고려사 28 - 列傳 9, 도서출판 민족문화, 2006
⋅ 민족문화추진회, 국역 고려사절요 Ⅱ, 1968
⋅ KRPIA http://www.krp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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