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계를 중심으로 본 조선시대의 생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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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들어가는 말

Ⅱ. 조선의 무뢰배들

ⅰ) 화적(火賊)

ⅱ) 검계(劍契)

ⅲ) 왈자(闊者)

ⅳ) 자객(刺客)

ⅴ) 검객(劍客)

Ⅲ. 숙종시대(肅宗時代)의 검계

Ⅳ. 영조시대(英祖時代)의 검계

Ⅴ. 순조시대(純祖時代)의 검계

Ⅵ. 맺는 말


본문내용
Ⅱ. 조선의 무뢰배들

우선 조선시대에 칼을 쓰던 사람들이라고 한다면야 장수로 대표되는 무인(武人)들이나 별운검(別雲劍) 별운검 :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이들에 대해서 나와 있는데, 「세조실록」에 보면 세조 2년 6월 2일 기록에 “대개 어전(御殿)에서는 2품 이상인 무반(武班) 2명이 큰 칼을 차고 좌우에 시립(侍立)하게 되어 있다.”라고 나와 있다. 이들이 바로 별운검이며, 이 별운검은 상시적으로 존재한 것이 아닌, 임금을 호위하던 임시 벼슬에 있었던 이들로 무반뿐만 아니라 문반이 맡기도 하였다.
등과 같은 특별 관직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갑사(甲士) 갑사 : 『경국대전』권 4 「병전」에 보면 오위(五衛) 중 의홍위(義興衛)에 속해 있는 정규군으로 나온다. 같은 책의 다른 기록에 보면 총 14,800명까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전기에 존재하였으나 그 후에는 역사 속으로 자취를 감추게 된다. 이들은 다양하게 나뉘어져 있었는데, 국경지역을 수비하는 갑사를 양계갑사(兩界甲士), 궁성을 수비하는 갑사를 경갑사(京甲士), 호랑이 사냥을 전문적으로 하는 것을 착호갑사(捉虎甲士)라는 식으로 다양하게 나뉘어 진다. 그리고 이들은 상근하는 것이 아닌 순번을 나누어 몇 개월간 근무하고 복역하며 살아갔다.
라고 불리는 정규군인들이나 속오군(束伍軍) 속오군 : 『조선왕조실록』「선조실록」에서 보면 선조 27년 이후 기사부터 그 실체를 확인 할 수 있다. 척계광의 『기효신서』에 나오는 속오법(束伍法)을 좇아서 만든 지방 군사제도로서, 병농일치(兵農一致) 사상에 따라 평상시에는 농사를 짓다가 농한기에 훈련을 받는 식으로 양성하였다.
등과 같은 일반병사들이 해당하겠으나, 이들은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한 자들이 아니니 그에 대한 설명 및 서술은 생략하도록 하겠다.
조선시대의 무뢰배들은 크게 2가지로 구분 할 수 있다. 도성 외에서 무력을 행사하는 화적떼와 도성 내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검계, 왈자 등으로 그 존재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좀 더 살펴보자면 자객 등으로서 비밀리에 무력을 행사하는 이들이 있었으며, 검객처럼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면서 어떠한 일을 맡아서 하곤 했던 존재들이 있었다. 이에 대해서 간단한 설명을 하자면 이렇다.
ⅰ) 화적(火賊)
화적은 도적(盜賊)이라고도 하며, 이들은 백성들이 기근 등이 들어서 살기 힘들거나 생활을 영위하기 힘들 때마다 등장하는 이들로서 역사로서 친다면 삼국시대부터 존재 『삼국사기』「신라본기」권 제 11의 진성여왕 3년조를 보면 “국내 여러 주와 군에서 납세를 하지 않아 창고가 비고 국가 재정이 어려워지자, 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독촉하였다. 이로 인하여 도처에서 도적이 봉기하였다. 이 때 원종 ․ 애노 등이 사벌주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이라는 기사가 있다. 이를 보아 당시에도 도적이 있었음과, 그러한 도적이 생기는 것은 바로 흉년이 들거나 백성들이 살기 힘들 때라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하였다. 기록상에는 그럴 뿐이지 실제로는 그보다 더 오래전부터 존재 하였을 수도 있으며, 이들은 수많은 재물들을 약탈하고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였다.
화적들 중에서도 의적(義賊)이라는 존재는 자신들을 위해서 싸우기보다도, 일반 백성들을 위하여 싸우는 등의 정의로운 모습을 보여주곤 한다. 이들을 대표하는 자는 홍길동(洪吉童) 홍길동을 가상인물로 보는 견해가 여럿 있긴 하나, 사실 실존인물이다. 이에 대해서는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에서 그에 관한 기사가 여럿 등장하는데 연산군 6년 10월 22일의 기사를 보면 “영의정 한치형(韓致亨)·좌의정 성준(成俊)·우의정 이극균(李克均)이 아뢰기를,“듣건대, 강도 홍길동(洪吉童)을 잡았다 하니 기쁨을 견딜 수 없습니다. 백성을 위하여 해독을 제거하는 일이 이보다 큰 것이 없으니, 청컨대 이 시기에 그 무리들을 다 잡도록 하소서.”하니, 그대로 좇았다.“라고 서술되어 있다.
, 임꺽정, 장길산 등으로서 당시 조선을 발칵 뒤집어 놓기도 하였다. 이 중에서도 임꺽정(林巨正)은 이억근(李億根)이라는 개성의 포도관(捕盜官)을 죽여 버릴 『조선왕조실록』「명종실록」 명종 14년 3월 27일 기록에 보면 “패두 이억근(李億根)은 일찍이 도적 수십 명을 잡은 적이 있었다. 이때 본부가 신계(新溪)의 첩정을 인하여 군사를 동원하여 적을 포위하였는데, 이억근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새벽을 이용하여 적소(賊所)에 들어갔다가 일곱 대의 화살을 맞고 죽었다.”이라고 쓰여져 있다.
정도로 위세를 떨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소설에서 나오는 것처럼 항상 의로운 행동만을 하는 것이 아닌, 재물을 가지고 살아가며, 그러한 돈에 욕심을 가진 이들이 많은 잔인한 폭력집단으로 보는 것이 더 옳다고 봐야겠다. 이들과 혁명을 부르짖는 봉기군과는 엄연히 다르다. 게다가 그들은 잔인한 행각으로서 도리어 백성들을 괴롭히곤 『조선왕조실록』「명종실록」 명종 8년 6월 14일 기록에 보면 “경주(慶州)의 도적은 신들이 남에게 전해들은 소문이 아니고 모두가 확실한 일이므로 감히 아뢰었는데 그 방자한 형상은 매우 심합니다. 지난 정월에 어떤 경산(慶山) 사람이 경주 도적을 지목한 일이 있는데 한밤중에 도적이 그 움집에 들어가 목을 베어갔습니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것을 보아서 도적들의 행각이 결코 정의롭지만도 않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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