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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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답사 개요
이번 답사는 강화도에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는 역사적 유물을 살펴보는 지역답사였다. 여타 많은 지역 중에서 강화도를 선택하게 된 이유는, 이 섬이 타 지역과는 달리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시기별 유적과 유물들이 다양하게 남아 있어 한반도의 전체의 역사를 개괄적으로 살펴보는 데 유익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강화도는 단군왕검의 얼이 살아 숨쉬는 역사의 고장이며, 조국수호와 국난극복의 상징이 되어 왔다. 상고시대에는 갑비고차라 하였고 939년 고려 태조 때 강화현으로 개칭되어 "강화"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강화도 남쪽 마니산에는 단군에게 제사를 지냈던 참성단이 있는데, 강화도가 선사시대 한민족 근원의 중심지가로서 그 역할을 하였음을 보여준다, 이후의 역사에서는 크고 작은 격전의 중심지가 되었다. 삼국시대에는 강화도의 교동도가 고구려, 백제의 최대격전지인 관미성으로 추정될 만큼 한강유역의 확보 전투와 관련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정책으로 인해 강화도는 고구려에 귀속되었고, 이후 고구려가 쇠퇴하고 신라가 등극하면서 신라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강화도는 통일신라시대에 전투의 중심지이자 대당 무역과 자원 확보의 중심지로서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고려시대에는 강화도를 기점으로 39년간 계속된 몽고의 침략과 수탈에도 굴하지 않고 끈질기게 항쟁을 계속하면서, 고려시대 호국불교의 산물인 팔만대장경을 편찬하였다. 조선시대에도 역시 국가의 위기 시마다 주요 요충지로서 역할을 다하였는데, 1627년 정묘호란과 1636년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강화도는 종묘사직을 지키기 위한 주요 방어 지역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후 효종, 숙종을 거치면서 진, 보, 돈대와 같은 방어시설이 정비되어 섬 전체가 거대한 요새가 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쇄국정책과 개화를 요구하는 서양 열방 세력의 충돌지가 되어,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의 전쟁터가 되었다. 두 전쟁에서 조선군은 서양 세력에 비해 조악한 무기를 사용하였지만 대항의 중심지로서 우리 민족의 저력을 보여주었다. 이후 강화도는 1875년 운양호사건을 계기로 강화도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일제 식민지시기의 전초가 되었다.
이번 답사에서는 강화도의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중심으로, 시대마다 대표적인 유적지라고 불릴 수 있는 선사시대의 고인돌, 삼국시대의 전등사, 고려시대의 5층 석탑, 조선시대의 유적지인 광성보를 차례대로 살펴봄으로써 한반도 역사와 함께 했던 강화도의 가치를 확인해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에 의의를 두었다.
Ⅱ. 강화고인돌 - 선사시대
5월 18일(일) 아침 6시 30분 쌀쌀한 아침 기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강화도행 버스를 타기 위해 신촌 버스터미널에 모였다. 원래 계획은 전등사에서부터 강화도를 북쪽으로 종단하면서 각 유적지를 돌아볼 계획이었지만, 교수님께서 늘 지적해 오셨던 교통편이 문제가 되어 시작부터 계획이 변경되고 말았다. 그래서 먼저 강화버스터미널에 내려서 고인돌부터 본 후 전등사까지 남쪽으로 종단하기로 하였다. 6시 50분 드디어 강화도행 버스를 타고 답사를 시작했는데, 이른 시각이라 교통이 그리 복잡하지 않아 1시간 30분 만에 강화도버스터미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일단 그 곳에서 아침식사를 한 후 우리는 첫 목표인 강화 고인돌을 향해 출발했다.
인천시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에는 고인돌들이 여러 기 분포하고 있는데, 강화 지석묘로 알려져 있는 이 고인돌은 현재 남한에서 일명 탁자식이라 부르는 북방식 고인돌로서는 가장 거대한 고인돌이다. 1964년 사적 137호로 지정되어 보호되어 왔고 최근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 고인돌은 그 크기와 멋있는 모양새로 인해, 남한에서 고인돌하면 이 강화 고인돌을 떠올릴 정도로 유명하다.
버스에서 내려 고인돌 유적지를 찾아갔을 때 우리를 반긴 것은 난데없는 스톤헨지와 모아이였다. 영국에 있어야 할 스톤헨지와 이스터 섬의 거상 모아이가 강화도에 있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혹시 현지에서부터 기증 받아 옮겨온 것은 아닌가 하고 신기해하며 만져보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것은 돌이 아니었고 실제 크기를 축소해 제작해 놓은 플라스틱 모형이었다. 선사시대의 거석문화를 설명하기 위해 제작해 놓은 것 같았지만 불필요해 보였다.
고인돌 유적지는 네모난 평지 위에 선사시대의 마을을 재현해 놓은 듯한 모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입구에는 솟대가 있고 중앙에는 커다란 움집이 있었다. 움집 안에는 여러 토기들과 도구들, 화덕 등이 꾸며져 있어 청동기 시대 사람들의 생활상을 짐작할 수 있게 하였다. 그 외에도 집터인 듯한 기둥 구멍 자리들이 군데군데 남아있었다. 움집을 뒤로하고 많은 돌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쪽으로 가 보았는데, 수업시간에 배웠던 마을공동 석기제작소를 꾸며놓은 것 같았다. 그 옆에는 무릎높이의 언덕이 쌓아져 있었는데 고인돌을 제작하는 과정을 묘사한 모형으로 추측되었다. 청동기 시대 사람들은 족장이 죽으면 먼저 시신을 묻고 지석을 세운 다음 주변에 흙으로 언덕을 쌓아 덮개돌을 운반했던 것 같다. 이집트에서 피라미드를 만들었던 것과 비슷한 방법인 것으로 추정된다.
유적지 한쪽 구석에 거대한 강화 고인돌이 있었다. 약간 한쪽으로 기울어진 모습의 이 고인돌은 놀라울 정도로 거대하고 수려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양끝의 마감돌은 없어져서 두 개의 지석이 마치 다리처럼 덮개돌을 지탱하고 있는 모습이다. 고인돌을 이루고 있는 덮개돌의 석질은 강화도에 흔한 화강 편마암인데, 이 고인돌의 주변에 이러한 규모의 석재가 없는 것으로 보아 돌산이나 해안 등지에서 바위를 운반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 예로 마니산에는 돌을 떼어 낸 흔적을 찾을 수 있지만, 그러한 대형 판석의 채취와 운반 기술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진 바가 없다고 한다.
강화고인돌 이외에 부근리, 오상리, 하점면 등에 걸쳐 고인돌 군이 분포하고 있다. 상당한 수의 대형 고인돌이 비슷한 장소에서 발견된다는 것은 당시의 사회, 경제, 정치적 권력이 상당히 집중되어 있음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한 기의 고인돌을 만드는데 약 300명 정도의 인부들이 동원되었을 것이라고 추측되는데, 이러한 대형 고인돌이 다수 발견되는 것은 고대 크고 강한 권력을 가진 사회조직이 존재했음을 시사한다. 강화도는 좋은 기후와 토지, 삼림을 골고루 갖추고 있어 자연적인 조건이 좋은 편이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풍요로웠을 것으로 여겨진다. 학계에서는 이러한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하나의 소국이 존재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도 제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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