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현대사] 강화도 학살현장 답사와 전쟁과사회를 읽고 느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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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05.16 / 2019.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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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학살 현장 답사를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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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사람들에게 강화도는 ‘서울에서 당일 코스로 다녀오기 좋은 관광지’ 정도로 인식되어 있는 섬이다. 답사를 가는 조원의 대부분이 처음에는 같은 생각이었고, 날씨 좋은 휴일에 ‘섬’으로 떠나는 기분은 일면 소풍가는 분위기에 가깝기도 했다. 그러나 사전 조사와 영상물 시청을 통해 접한 강화도는 그러한 일반적인 관광지와는 거리가 먼, 슬픔에 잠긴 땅이었다. 우리 일행은 이렇게 다소 무거운 마음으로 답사에 임했다.
강화 시외버스 터미널에서부터는 서영선 강화 유족회장님과 (동문 선배님이시기도 한) 김정서 선생님이 동행하셨다. 회장님의 안내로 둘러본 곳은 구 강화대교 갑곶리 갯벌 학살지와 강화읍의 양조장, 곡물 검사소였다. 이곳들은 회장님의 가족이 전쟁 당시 구금 당하고 학살당한 곳이다. 당시 상황에 관해 담담하게 설명하시는 회장님의 말씀 속에는 전쟁이라는 비극과 진상 규명의 목소리에 무관심한 정부에 대한 야속함은 있었지만 무자비했던 학살 가해자에 대한 원망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다만 본인과 가해자인 특공대 관계자들 생전에 진실이 밝혀질 수 있을까, 하며 씁쓸해하셨을 뿐이다.
한국전쟁 당시 치안공백 상태의 강화도에는 이른바 ‘특공대’가 조직된다. 강화 특공대는 공권력의 부재 속에서 빚어지는 혼란을 어느 정도 정리하는 데에 일조 했지만 정부의 방조 아래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한다. 좌익 요소를 제거한다는 명분을 걸기는 했지만 정작 특공대 자신도 이데올로기에 관해 무지한 채로, 본인의 과거 불법행위를 은폐하기 위해, 개인적인 보복의 차원에서, 아니면 전쟁이라는 대혼란이 빚어낸 집단적 또는 개인적 광기에 의해 살인을 저질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들 중 일부는 당시의 우익 활동을 발판으로 아직도 강화 지역 사회 내의 권력층을 구성하고 있다. 또다른 사람들은 전쟁이 끝난 후 (어떤 이유이건 건에) 피학살자의 유족과 다름없이 숨죽이며 살아간다. 피학살자의 유족이 연좌제의 사슬에 묶여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었던 것은 물론이다. 서영선 회장님 또한 강화 출신인 것을 숨긴 채 서울에서 생활해야만 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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