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일본어학] 과거 한일국교관계의 동요와 통신사-역지통신실시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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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 론 ----------------------------------- 1


Ⅱ. 본 론 ------------------------------------ 2

1. 역지통신 실시배경 ---------------------------- 2
1) 조선조정의 입장 ------------------------- 2
2) 도쿠가와 막부의 입장 ---------------------- 3
3) 대마번의 입장 ------------------------------ 4

2. 역지통신 실시과정 -------------------------- 5
1) 통신사 파견의 연기 ----------------------- 5
2) 대마역지통신의 교섭 ----------------------- 10
3) 역지통신 시행 ---------------------------- 14

3. 역지통신의 의의 --------------------------- 18


Ⅲ. 결 논 ----------------------------------- 21

Ⅳ. 참고문헌 ------------------------------------ 22
본문내용
서론
조선후기 조일관계에 있어 최후의 통신사인 1811년 신미통신사(辛未通信使)는 이전의 사행과는 다른 형태로 이루어졌다. 즉 이제까지의 모든 통신사는 에도(江戶)를 방문하여 도쿠가와(德川)장군을 직접 만나서 국서(國書)를 교환하고 접대를 받았지만, 여러차례의 교섭 끝에 겨우 실현된 이 통신사는 에도가 아닌 쓰시마를 방문하는 ‘역지통신(易地通信)’ 의 형태였다. 또 국서교환도 도주(島主) 저택에서 양국의 관리 사이에 이루어진 이주 이례적인 통신사였다.
이전의 통신사는 양국의 평화를 증진시켜 나가면서 우호관계 성립의 발판을 마련했다. 초기에는 양국의 정치적 필요에 의해 성립되었지만, 왕래가 거듭되는 가운데 오히려 양국의 평화에 지도성을 갖기 시작하였고, 처음의 정치적·군사적 성격에서 문화적인 성격으로 변해갔다. 그 결과 문화성(文化性)이 심화되어 초기의 긴장감은 완화되고 점점 항례화 또는 형식적으로 되었다. 막부의 자세는 삼사의 인견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서서히 교만한 태도로 변하였고, 조선측도 예분의식(禮分意識)이 강해져 조엄(趙 )과 같이 조선국왕이 일본의 신하인 도쿠가와 장군과 대등례를 나누는 것에 대한 비판의식이 일어나게 되었다.
1811년 신미통신사를 역지통신이라 일컫는데 왜 1811년에 거행되었으며 또 그것은 어떤 배경에서 이루어진 것일까. 널리 알려진 것처럼 역지통신을 朝鮮朝廷과 도쿠가와 막부의 재정긴축정책의 일환으로 보는 쪽과 일본의 조선멸시관 등장으로 풀이하는 쪽 두 가지 시각이 있다. 조선조정과 도쿠가와 막부 모두 재정이 크게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고 또 18세기 중반 이후 일본이 조선을 보는 시각이 전과 다르게 비우호적인 쪽으로 기울어진 것도 사실이라고 한다면, 이 때 더욱 중요한 것은 朝鮮朝廷, 德川幕府, 對馬藩의 이해관계가 어떻게 서로 맞물려 들어가서 역지통신이 실시되었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참고문헌
中村榮孝著, 김용선역, 《"일본은 우리가 키웠다" 朝鮮通信士 에도시대의 조선통신사-교린외교의 상징으로서-》, 東潮書館, 서울, 1982.
손승철, 《近世 韓日關係史》, 강원대학교 출판부, 춘천, 1987.
손승철, 《조선시대 한일관계사연구》, 지성의샘, 서울, 1994.
三宅英利著, 김세민·강대덕·유재춘·엄찬호 옮김, 《조선통신사와 일본》, 지성의샘, 서울, 1996.
이진희·강재언 지음 김익한·김동명 옮김, 《한일교류사-새로운 이웃나라 관계를 구축하기 위하여》, 학고재, 서울, 1998.

논문

손승철, 〈朝鮮後期對日政策의 性格硏究〉,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89.
정성일, 〈易地聘禮 實施前後 對日貿易의 動向(1809∼1812)〉, 《경제사학》15, 한국경제사학회,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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