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과학 해방전후사의 인식 이광수 기업인 그리고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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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전후사의 인식
-이광수, 기업인 그리고 나
춘원 이광수, 친일과 민족주의 사이에 서서
1921년, 나는 다시 고국의 땅을 밟게 되었다. 1919년의 3·1운동의 여파가 가시고, 일제는 기존의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한국에 대한 지배 정책을 변경했다. 3·1운동의 거센 저항을 일제도 실감했는지, 일제는 자유로운 문단 활동을 보장해 주었고, 일본인과 조선인은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내선일체론을 주장했다. 변화는 이에 끝나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민족 해방 운동의 방향도 여러 갈래로 나누어지기 시작했다. 기존의 무력적인 투쟁에서 문화적인 방법으로 계몽주의에 의한 민족 실력 양성 운동이 시작되었다. 나는 이 민족 실력 양성 운동을 크게 지지하는 입장이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말씀처럼 우리 민족에게 있어 지금 필요한 건 무력이 아니다. 우선 우리의 실력을 먼저 양성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 나라의 인텔리. 즉, 지식인으로서 우리나라의 민중을 계몽해야 할 우선적인 임무를 부여 받았다.
그리하여 나는 1922년, <개벽>이라는 잡지에 「민족개조론」이라는 글을 투고했다. 이 글의 내용으로는 하지만 이 「민족개조론」은 상당히 많은 비판을 받게 되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3.1운동 이후 조선 총독부에 의해 크게 선전된 독립불능론의 근거로, 한국 민족의 성격의 결함, 인종적 열악·저능을 과학등을 동원하여 제시하고, 한국민족이 식민지민으로 전락하고, 또 못사는 것은 일체 한국민족의 잘못이라고 지적했던 것. 둘째, 민족 해방투쟁을 부정하고 독립 운동자를 비난하고 독립운동의 무위를 강조함으로써 민족해방투쟁을 포기하도록 설득하였다. 셋째. 모든 활동은 비정치적이어야 한다고 못박음으로써 일제의 후견아래서 문화운동을 전개할 것을 주장하였다. 나의 민족 개조론은 한편에서 보면 독립 초기의 투항주의이고, 다른 한편에서 보면 민족 생존권의 모습을 하고 있다. 나의 이러한 타협적 자세가 일제의 문화통치와 결부된다고 크게 반발하는 세력도 존재했다. 또한 나는 「민족개조론」에서 프랑스의 제국주의 학자 르봉의 학설을 기초로 하였다. 우리 한국 민족의 민족성의 못남을 낱낱이 들추어내어 이를 개조해야 된다는 논법은 정당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나, 이광수는 1922년 2월 12일, 수양동우회를 조직하게 된다. 존경하는 도산 안창호의 흥사단 계열의 독립운동단체로서, 민족의 부흥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나는 이를 통해 우리나라의 독립에 힘쓸 것이다. 수양동우회가 전개한 농촌운동은 주로 이상촌 건설과 협동운동이었다. 비록 이 단체가 절대로 시사 또는 정치에 관여하진 않는다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말이다.
나는 문인으로서의 활동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15년 인촌 김성수 선생님의 도움으로 일본의 와세다 대학 철학부에서 공부를 했다. 재학 기간 동안 일본의 선진 사상을 많이 접해볼 기회가 주어졌으며 후에는 <매일 신보>에 무정을 연재하게 되었다. 게다가 3·1운동의 계기가 되는 2·8독립선언의 선언서를 기초하기도 했다. 귀국 후 나는 1923년 동아일보의 객원이 되어 언론에서의 활동도 시작했다. 동아일보의 객원으로 일하면서 나는 새로운 글을 썼는데, 1924년 1월 2일부터 6일까지 5회에 걸쳐 「민족적 경륜」이라는 논설을 연재했다. 이 글에서 나는 우리나라가 일제와 타협하여 자치운동을 추진해야 한다는 타협적 민족주의의 성격의 발언을 했었고, 이것이 사회주의자와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의 속을 긁었나보다. 난 나의 생각이 결코 틀리지 않다고 말하고 싶다. 이전 「민족개조론」에서도 말했듯이, 우리는 현실을 바라보기 보다는 좀 더 장기적인 안목을 가질 필요가 있다. 비록 일제가 이러한 나와 다른 민족 개량주의의 자치운동을 당시 치열하게 전개된 사회운동, 민족 해방운동에 대한 분열책으로 지원 했다고 할 지 라도 이것은 정당한 논리였다.
1930년대 『동아일보』는 브나로드 운동을 전개한다. 이 운동은 편집국장이었던 내가 그 운동의 시범작으로 「흙」을 썼다. 「흙」은 농민·노동자의 계몽과 생산 향상에 관련된 소설로써, 나는 민족의 대다수인 농민에게 필수적인 과학적 지식과 사회 기구의 지식을 주는 것이 만반 활동의 원천이라 보았고 이러한 배경 아래서 탄생한 작품이다. 이는 곧 동우회의 이론과 결부된다고 볼 수 있다.
나는 1939년에 <조선문인협회>의 회장을 맡게 된다. 1930년 이후 일제는 민족말살정책을 수행하게 된다. 이 시기에는 일제의 문화정책이 더욱 노골화되면서 국민문학의 건설, 내선일체의 구현, 총력전 수행을 위한 적극협력 등의 구호 아래 많은 문인들이 친일과 변절의 길을 걷게 되고 한국어문학에 대한 말살정책도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다.
또한 1940년 2월 11일부터 실시된 창씨개명에서 나는 지식인으로서는 제일 먼저 나의 이름을 香山光郞(가야마 미쓰오)라 개명한다. 그리고 나의 개명에 대한 생각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나 자신은 천황의 신민으로서 내 자손과 조선 민족의 장래를 고려한 끝에 이리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공수라는 씨명으로도 천황의 신민이 못 될 것이 아니다. 그러나 가야마 미쓰오가 좀 더 천황의 신민답다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내선일체를 국가가 조선인에게 허하였다. 이에 내선일체운동을 할 자는 기실 조선인이다. 조선인이 내지인과 차별 없이 될 것 밖에 바랄 것이 무엇이 있는가. 따라서 성명 3자를 고치는 것도 그 노력 중의 하나라면 아낄 것이 무엇인가. 기쁘게 할 것이 아닌가. 나는 이러한 신념으로 가야마라는 씨를 창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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