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포트 (118)
고구려의 왕들에 관한 잘못된 정보가 많이 나온다. 소수림왕의 경우 서거 직전의 모습만 나오기 때문에 그다지 문제될 것이 없지만 고국양왕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두산백과사전에는 고국양왕이 이렇게 나타나있다.고구려 제18대 왕(재위 384~391). 이름 이련(伊連) 어지지(於只支). 소수림왕의 아우.
13페이지 | 1,700원 | 2008.08.01
[임나일본부설] 임나일본부설의 연구와 형성, 다양한 임나일본부설과 임나일본부설의 근거, 비판 및 임나일본부설의 치명적 결함 분석
고구려에 패한 기록이 보이는데 이는 당시 왜군이 한반도 남부를 장악하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특히 이른바 신묘년 기사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왜이신묘년래도해파백잔.라이위신민)의 해석을 두고 논쟁이 일고 있다. 대체로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 가야,
11페이지 | 5,000원 | 2008.07.29
신묘년(辛卯年)조 기사『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서 백잔(백제)과 □□□라(가라,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임나일본부설의 결정적 증거 : 자국의 국민이 아닌, 동시대(5세기 초) 당대 고구려인이 만든 자료이기 때문에광개토대왕비
26페이지 | 1,600원 | 2008.05.16
고구려의 공격이 있기 전 도성을 북한성(양주나 북한산 방면)에서 남한성(송파구 풍납토성이나 하남시 방면)으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관미성은 서해에서 한강을 통하여 수도 남한성으로 가는 입구를 지키던 성으로 한강하류나 강화도, 교동도 방면에 있었다.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
12페이지 | 2,500원 | 2008.03.05
고구려에 패한 기록이 몇 군데 보이고 있는데, 이는 당시에 왜군이 한반도 남부를 장악하고 있었음을 입증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이른바 신묘년기사는 그 확고부동한 증거로 제시되었다. 이 부분의 해석을 둘러싸고 수 십 년간 논쟁이 전개되어 아직도 종결되지 않은 상태이다. 신묘년기사란
17페이지 | 1,400원 | 2008.03.01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 **신라를 정복하고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해석했기 때문이다. 임나일본부설을 정설로 삼은 일본인들은 본격적으로 식민사관의 기초를 만들기 시작했다. 신묘년조 기사가 식민사관의 도구로만 이용되던 1930년대 말경 정인보는 신묘년 기사의 주체를 고구려로 보는 새
16페이지 | 1,400원 | 2007.09.14
고구려의 속민으로서 조공을 바쳐왔으나 왜가 신묘년(서기 391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백제) □□과 신라를 정복하여 신민으로 삼았으므로 병신년(서기396년)에 광개토대왕이 친히 대군을 이끌고 백잔(백제)군을 토벌했다.” 라고 해석했다. □는 마모되어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글자이다. 일본 학자
21페이지 | 1,800원 | 2007.08.30
고구려는 남하정책을 취하였다. 바다를 건넌 야마토 조정의 군세는 백제와 신라를 도와서 고구려와 격렬하게 싸웠다. 414년에 세워진 고구려 광개토대왕 비문에 4세기 말부터 5세기 초의 사건으로 이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는 (중략) 백제와 임나를 지반으로 한 일본군의 저항으로 인해 정복은 이
17페이지 | 1,700원 | 2007.08.01
고구려 의 속국으로 조공을 바쳐왔다.》 이고 후반부를 보면 《그런데 신묘년 에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가야, 신라 육안으로 식별할 수 없는 파자 3개를 일본학계에서는 伽倻(가야), 新(신) 으로 보고 있다를 치고 신민으로 삼았다》 인데 이 해석은 해석자체만으로 보자면 어느 하나 흠잡을 곳이
10페이지 | 2,000원 | 2007.07.19
[한국미술사, 고구려불상,고구려,불상,불교] 고구려불상에 관하여
고구려 불상으로 보이며, 글에 나타난 ‘신묘(辛卯)’는 고구려 평원왕 13년(571)년으로 추정된다. 전체적인 불상 형태는 큼직한 얼굴과 손, 원통형의 체구 등에서 연가 7년명 금동여래입상(국보 제119호)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지만, 강인한 기품이 줄어들고 유연하면서 세련된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6)원
17페이지 | 2,000원 | 2007.0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