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문학, 처용] 처용에 대한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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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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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며
Ⅰ. 처용의 흔적
1. 「처용랑망해사」조
2. 고려가요 <처용가>
Ⅱ. 처용에 대한 해석
1. 울산 지방토호의 아들
2. 이슬람 상인
3. <처용가>의 해석에 관하여
Ⅲ. 신격화된 존재로서의 처용
Ⅳ. 처용의 현대적 해석
1. 희곡 <팔곡병풍> - 인격화된 동해용의 아들
2. 뮤지컬 <처용> - 무속적 능력을 가진 ‘인간’ 처용
3. 드라마 <이제 처용은 춤추지 않는다> - 마지막엔 결국 춤을 추는 처용
마치며
참고문헌
-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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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은 이렇게 역사에 등장한다. 동해 용의 일곱 아들 중 하나라는 처용의 존재를 두고 학자들은 여러 가지 해석을 하고 있다. 해석은 여러 가지로 나뉘는데, 처용이 용왕의 아들, 역신을 몰아내는 신으로서 무가적인 성격을 갖는다는 입장과 더불어 역사학자들은 동해 용이 '어떤 인간 존재'를 상징하고 있다고 보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중앙의 정권과 대립하던 울산 지방의 호족이 화해하려는 의도에서 질자(質子)를 바친 것으로 보는 입장이 있는가 하면, 이슬람 상인으로 보는 입장이 있다.
1. 울산 지방토호의 아들
제 49대 憲康大王 때에는 서울에서 바다 어귀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이 서로 이어졌고 초가집은 하나도 없었다. 풍악과 노래 소리가 거리에서 끊이지 않았고, 風雨는 사철 순조로웠다.
『삼국유사』의 「처용랑 망해사」조('處容郞望海寺'條)에서도 알 수 있듯이, 헌강왕 당시의 경주는 겉으로는 호화와 번영, 태평과 윤택을 구가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 실은 소비적인 기풍, 퇴폐적인 문화로 점차 기울던 ‘병든 도시’였다.
반면에 농촌은 신라사(新羅史)를 변혁시킬 수 있는 에너지를 축적하면서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꿈꾸며 반(反)경주, 반(反)중앙정부의 실력을 쌓기에 분주했는데, 울산 지방도 그 중 유력한 곳의 하나였다. 헌강왕이 그곳에 행차한 것은 그 지방 세력을 어루만지고 견제하기 위해서였고, 처용을 경주로 데리고 온 것은 그를 질자(質子)로 삼아 울산 지방의 세력을 계속 억제코자 한 데 그 의도가 있었다.
입경(入京)하여 아름다운 여인과 결혼한 처용도 병든 도시인 서라벌의 분위기에 그대로 흡수되어서 밤이 깊도록 놀이에 탐닉하게 되었다. 한편 퇴폐한 도시의 상징이기도 한 그의 아내도 역신(疫神)으로 비유된 유한공자(遊閑公子), 혹은 타락한 화랑의 후예와 동침하면서 반윤리적이고 반인륜적인 생활에 빠진다. 야밤에 밖에서 돌아온 처용은 아내와 탕아의 불륜의 현장을 목도하고, 지방출신이라는 외래자의 한계도 느끼면서 모든 것을 체념하고 포기하는 심정으로 춤을 추고 노래하면서 가정으로부터 뛰쳐나오게 되었다. 이 분석에 따르면 <처용가>는 아내를 빼앗긴 지방토호 출신의 한 남정네가 토해낸 참담한 노래가 된다.
2. 이슬람 상인
처용은 해양세력을 상징하는 용의 아들이다. 삼국유사에서 용은 해양계에서 와 새로운 집단을 형성한 자들을 뜻한다. 그러면 처용은 어디에서 온 사람인가?
강릉의 창해역사 어마장군 설화, 탈해왕 설화, 처용설화 모두 동해안 일대에 분포된 용신신앙에서 유래된 수신동자 설화와 일련의 관련성을 갖는다. 탈해는 원래 해양계에서 온 세력으로 신라인들을 다스리다가 토함산신이 된다. 그 경우와 마찬가지로 개운포의 뒷산에 처용을 산신으로 신격화하여 모셨던 처용암이 있었다. 처용 또한 해양 도래인으로서 용신으로 신격화하였다가 다시 산에 모셔짐으로 해서 산신까지 겸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 산과 바다의 정령이라고 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렇게 처용은 멀리 이슬람에서 와서 이적을 행하여 용신으로 신격화하였고 산신까지 겸하게 된 것이다. 그 이적을 이도흠은 의술로 본다. 이슬람이니 처용은 발전된 의술을 빌어 신라인의 의술수준으로는 고치지 못할 병이라고 생각한 병을 치료하였기에 헌강왕은 미모의 아내에다 더해 벼슬까지 주며 처용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애쓴 것이고, 이런 이슬람인들의 능력은 신라 사람에게 인가의 능력을 벗어나는 신비한 행적으로 비쳐졌다는 것이다.
문헌에 전해 오는 처용의 용모가 서역(西域) 사람의 모습이라는 것, 상술(商術)에 밝은 저들은 세계를 무대로 무역업에 진출하여 중국을 거쳐 신라에도 들어왔다는 것, <처용가>의 현장인 개운포가 저들이 신라를 출입할 때 이용한 항구였다는 것, 이슬람 상인들이 신라에 상륙하여 무역활동을 한 증거로서, 각종의 서역 물건이 현지에서 발굴되거나 그 물명(物名)이 문헌에 등재되어 있다는 것, 헌강왕이 이슬람 상인의 아들 한 명을 서라벌에 데려 온 것은 국제무역 분야에서 왕정(王政)에 보좌토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는 것 등이다. 이 분석에 따르면 <처용가>는 왕의 파격적인 배려에도 불구하고 신라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이방인이 그의 아내를 빼앗긴 아픔을 토로한 노래가 된다.
3. <처용가>의 해석에 관하여
이도흠의 종합적인 방법에 따른 「처용랑 망해사」조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처용랑 망해사」조는 여러 이야기가 세월을 거쳐 켜켜이 쌓아진 적층설화다. 이것을 하나로 놓고 해석하여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이를 해체하면, 「처용랑 망해사」설화는 최소한 26대 진평왕 대로부터 내려오는, 문(門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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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 「처용랑 망해사조와 처용설화의 연구」, 박기호
2003, 옛사람 옛노래 향가와 속요, 박노준
2006, 처용설화를 소재로 한 희곡에서 나타난 처용의 Character 분석, 정재화
2007, 처용설화의 현대적 변용 연구, 오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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