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민심서] 목민심서 감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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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4.22 / 2019.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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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고 싶은 말
- 단순한 내용요약이 아닌 스스로의 생각과 느낌을 중심으로 작성한 A+ 감상문입니다.
-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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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약용과 목민심서
2. 작품 분석
3. 목민심서와 오늘날의 지방행정
4. 현시대의 눈으로 본 다산의 목민관
5. 시대를 앞서는 선각자, 정약용
6. 맺음말
-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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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약용과 목민심서
목민심서의 저자 다산 정약용은 스스로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제법 문자를 알았다'고 회고했다. 9세에 어머니를 여의었고, 10세부터 과예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마침 아버지가 벼슬을 하지 않고 있는 동안에 경전과 사서, 고문을 매우 부지런히 읽었으며, 또 시율을 잘 짓는다는 칭찬을 받기도 했다. 이 무렵에 지은 시를 모아 『삼미자집』을 만들었다(현재 전하지 않음). 삼미의 뜻은 유년시절에 마마를 앓아 눈썹에 마마 자국이 있어 눈썹이 셋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다산은 15세에 홍화보의 딸(풍산 홍씨)과 결혼했다. 마침 아버지가 호조좌랑으로 다시 벼슬에 나가게 되어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올라와 살게 되었다. 이것은 지방수재에 불과했던 그에게 세상과 학문에 대한 새로운 시야를 열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다산은 이때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이때 서울에는 이가환 공이 문학으로써 일세에 이름을 떨치고 있었고 자형인 이승훈도 또한 몸을 가다듬고 학문에 힘쓰고 있었는데, 모두가 성호 이익 선생의 학문을 이어받아 펼쳐나가고 있었다. 그래서 약용도 성호 선생이 남기신 글들을 얻어 보게 되자 흔연히 학문을 해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16세 때(정조 원년 1777)에 아버지가 화순현감으로 나가게 됐다. 다산도 따라가서 그 이듬해에는 동림사에서 독서를 했다(〈동림사독서기〉 참조). 19세 봄에는 아버지께서 예천군수로 옮겼다. 다산은 진주에 들러 노닐다가 예천으로 가서 쓰러져가는 관청집에서 공부를 했다. 21세 가을에는 봉은사에 머물면서 경의과의 과목을 공부했다. 22세 봄에는 경의과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공부하게 됐다. 여기서 다산은 10년 연상인 33세의 정조를 처음 만난다. 정조가 중용강의 80여 조목에 관하여 답변토록 과제를 냈다. 이발기발의 문제에 있어서 이벽은 퇴계 이황의 학설을 주장했고 다산이 답변한 내용은 율곡 이이의 학설과 우연히 합치됐다. 정조가 다 보고 난 후 다산을 매우 칭찬하고 1등으로 삼아주었다. 다산은 이후 성균관 우등생으로 학자군주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자료평가
- 유용한내용입니다 감사합니다
- pint1***
(2015.04.22 09:17:53)
- 좋네요 급햇는데 감사합니다
- sunny1***
(2012.09.18 21:4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