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생활사(역사)]조선시대재산상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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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사 시간 레포트로 제가 직접 책 보고 작성했습니다.
수준이 낮거나 그러진 않을꺼에요
목차
Ⅰ. 머릿말
Ⅱ. 조선시대 상속제의 특징 및 변화
1. 제사와 상속
2. 조선전기 상속제의 특징
3. 조선후기 이후의 상속제의 특징 및 변화
4. 분재의 유형
5. 분재기를 통해 본 상속의 사례
Ⅲ. 맺음말
본문내용
Ⅰ. 머릿말

인간이 죽음에 임박했을 때는 무엇을 생각하게 될까? 정신적이든 물질적이든 이 세상에 무언가를 남기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 아닌가 싶다.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준다든지 제사를 계속 지내게 함으로써 나의 존재를 계속해서 남기고 싶은 것이 인간의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 상속대상자, 즉 자식들에게 상속은 생존의 문제이고, 나아가 부귀영화라는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가장 확실한 방편이었기 때문에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재산상속은 인간의 본능문제, 삶의 현실문제와 직접적으로 결부되어 있었고, 이것은 또한 사회변화에 매우 민감하게 반영되었다. 불교사회에서 유교사회로의 변화, 가족제․친족제의 변화, 종법제의 정착을 통한 상속제의 변화가 분재기에 반영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조선시대 재산상속에 관한 법적 규정은 남녀균분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그 중 제사권을 잇는 적장자(嫡長子)에게는 상속분의 5분의1을 더 주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 첩에게서 난 자식이 있을 때 그가 양인여자첩 소생일 경우에는 적자녀의 7분의 1을, 천인여자첩 소생일 경우에는 10분의 1만을 상속하도록 되어있고, 그런 경우에도 아들, 딸 간에는 균등분배를 행하도록 규정하고 있다(『經國大典』 권5, 刑典, 私賤條) 즉 재산상속에 있어 장자, 차자, 남녀에 상관없이 자식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준다는 점이다. 이것은 단순히 관습을 넘어 노비의 수, 토지의 비옥도까지도 하나하나 따져서 정확히 균분한다는 현실적으로 적용된 상속관행이자 법이었다. 분재기 서문에 집주(執籌)라는 말이 예외 없이 언급되는 것은 ‘정확히 따져서 계산한다’는 의미였다. 이와 같은 법적 규정은 대체로 15세기 말경부터 조선조 말기에 이르기까지 거의 변화가 없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적어도 상속제에 관한 한 평등사회에서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17세기 중엽까지는 대체로 위와 같은 법에 의한 상속관행이 지켜졌으나, 유교사회의 제반문물과 제도가 지방 곳곳의 개인에게 침투하는 17세기를 전후한 시기부터 우리의 의식과 사회관습은 많은 변동을 겪게 된다. 남녀차별, 장․차자의 구별이 생기게 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점차 여성의 상속분이 감소해가며 장남우대 혹은 장남에게 주어지는 제사용 재산에 해당하는 봉사조(奉祀條) 내지 승중조(承重條)의 증가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일관되게 여성의 배제와 적장자의 우대, 봉사조 증대 등의 방향으로 진행되는 상속관행의 변화는 곧 종법사상 강화현상을 그대로 나타내 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 우리에게 불변의 혹은 고유의 ‘전통’으로 인식되고 있는 한국인의 유교적 종법제(宗法制)에 기초한 남성중심의 가족․친족관계 및 남녀관계란 사실상 특정 시기에 특정의 정치적․사회적․경제적 배경하에서 점진적으로 확립된 것임을 알려준다. ‘전통문화’라는 것이 단일한 내용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적․공간적으로 규정되는 것임을 알려주며, 나아가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전통문화의 중층적 성격을 밝혀내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 생각된다.
참고문헌
* 조선시대 생활사 한국고문서학회 엮음 (역사비평사)
* 조선양반의 생활세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백산서당)
* 조선시대의 상속제에 관한 연구 최재석 (역사학보)
* 서울六百年史 - 민속편 시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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