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례문화의 시기별 변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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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식 제사에서 의식을 거행하는 주체는 큰아들이다. 다른 형제나 자손들은 제사에 참석할 뿐 주재자는 되지 못한다. 결국 제사의식은 전적으로 장자(손)의 주관 하에 치르는 행사이고, 자연스럽게 맏며느리는 제물과 제수 준비를 전담하는 의무를 지게 된다. 며느리의 입장에서 볼 때 1년에 십여 차례 행해야 하는 제사는 그 자체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아직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큰아들과 맏며느리에게 과중한 책임을 지우는 이러한 제사방식을 계승해가야 할 ‘아름다운 전통’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른바 ‘아름다운 전통’이라는 유교식 제사방식은 과연 우리 나라의 반만년 역사와 궤를 함께 하는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언제 어떠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어떠한 과정을 거치며 형성되어갔을까, 그 이전의 모습은 어떠하였을까 하는 점들이다. 그리고 나아가 진정 아름다운 전통의 의미를 우리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며, 어떻게 계승해야 하는 것일까?
Ⅰ. 고려시대(고려의 불교와 제사)
고려의 지배적인 종교는 불교였다. 왕실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백성들이 불교에 의지하였고, 정치, 사회, 문화에서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불교의 영향이 스미지 않은 곳이 없었다. 고려시대에는 팔관회, 연등회 같은 다양한 불교 행사들이 거행되었고, 개인적인 상제례 또한 사찰에서 불교식으로 거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고려시대에 사람이 사망하면 시신을 화장한 뒤, 뼈를 수습하여 작은 관에 넣어 매장하거나, 작은 단지에 담아 절에 보관하였다. 오늘날 고려시대의 분묘가 거의 남아있지 않은 것은 물론 시대가 오래 된 이유도 있겠지만, 화장이라는 불교식 장법이 널리 행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제사 또한 사찰에서 올리는 재(齋)의 형태로 행해졌고 조상의 초상화를 그려 절에 영당(影堂)을 마련하여 보관하고 주기적으로 재를 올리기도 하였다. 고려 말 충렬와 16년에 절에 올라가는 것을 금지하지 조치를 내리면서도, 부모의 기일재(忌日齋)에 대해서만은 예외적으로 허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자손들이 보시를 잘하면 조상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어 자손들은 조상을 위하여 사찰, 불탑, 불상, 불종 등을 건립하고 재산을 사찰에 기부하기도 하였다. 그 가운데는 원찰(願刹) 원찰(願刹)이란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기 위한 사찰이다. 진영을 모신 건물을 중심으로 할 때는 원당(願堂)이라고도 하며 대궐 안의 원당은 내불당(內佛堂) 또는 내원당(內願堂)이라고도 했다.
이라는 형태로 개별 집안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사찰들도 종종 있었다.
형제자매들이 절에 모여서 재를 올릴 때, 실제로 제사를 진행하는 사람은 승려였다. 따라서 장자의 역할은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큰아들이건 작은아들이건 아니면 딸이건 상관없이 모두들 동등한 후손의 자격으로 재에 참여하여 조상의 극락왕생을 정성껏 기원하면 충분하였다. 이는 또한 당시의 친족 구조에서 연유하는 측면이 강했다.
불교적 전통이 강한 고려사회에서는 유고적 산물인 부계 중심의 친족관념보다는 혈족관념, 혈통의식이 우세하였다. 자신에게 피를 주었는가, 자신의 피를 이어받았는가의 여부가 더 중요한 문제였다. 이러한 관념은 조→부→자→손자로 이어지는 계통이 아니라, 조부모와 외조부모→부모→자녀→손자녀로 이어지는 쌍계(雙系) 또는 양측적(兩側的)혈통의식이다. 외가에서도 자신에게 절반의 피를 나누어주었기 때문에 친가나 마찬가지로 친밀하였고, 외손도 자신의 피를 이어받았기 때문에 친손만큼이나 사랑스럽게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에는 처가살이가 매우 일반적인 풍습이었다는 점도 빠뜨릴 수 없다. 아들 며느리보다는 딸 사위와 함께 사는 것이 보다 일반적인 상황에서 다른 곳에서 처가살이하는 아들 부부보다는 함께 사는 딸 사위가 인정상 친근한 것은 당연하였다. 이 의식이 재산상속에 그대로 반영되어, 아들이나 딸이나 차별없이 동등하게 재산이 분배되었다. 이리하여 고려시대에는 장자가 주도적으로 제사의식을 거행할 사회적 이념, 분위기가 형성되지 않았던 것이다.
Ⅱ. 조선전기(『주자가례』의 보급과 제례문화의 변화노력)
고려말 주자성리학의 도입과 유교이념을 표방한 조선의 건국은 고려의 불교 문화를 역사의 뒷편으로 밀어내었다. 신진 유학자들이 억불승유라는 대원칙 하에 불교를 비판하면서, 불교식 의례, 의식도 함께 비난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들은 국가적 차원에서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보급 권장함으로써, 모든 의식들을 유교식으로 대체하고자 하였다. 불교식 상제례 풍습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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