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증주의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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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실증주의
철학의 방법이 과학의 방법과 다른것이 아님을 주장하는 철학적인 입장. 바꾸어 말하면 과학으로 얻어지는 지식의 총체 이외에 참된 지식은 없다고 하는 입장. 실증주의라는 이름은 자연과학의 방법을 철학에 적용하려고 하였던 생시몽에서 비롯되었고 A.콩트가 실증철학으로서 확립하였다. 그 연원(淵源)은 영국의 경험론과 프랑스의 계몽주의 유물론(唯物論)에 있지만, 그 배경에는 자연과학의 급속한 발달과 공업 사회의 성립이 있다. 실증철학은 프랑스 혁명기의 대표적인 철학이 되었다. 또 E.마하, R.아베나리우스 등의 과학철학도 인식론에서 실증주의의 대표적인 것으로 꼽히지만, 19세기의 실증주의에서는 논리학이나 수학의 역할에 대해 충분한 고려를 하지 못하였다. 1920년대부터 빈 학단(學團) 사람들을 중심으로 제창되기 시작한 새로운 실증주의는 이 점의 결함을 보충하고, 논리학이나 수학의 역할을 높이 평가하는 한편, 이들 학문이 경험과학과 다르고, 세계에서의 정보를 주지 않음을 지적하였다. 여기에서 이 새로운 실증주의를 논리실증주의라고 한다. 현재는 논리실증주의도 또 얼마간 비판을 받아 분석철학(分析哲學)이라 불리는 것으로 변신(變身)하고 있지만, 이것은 이미 실증주의라고는 불려지지 않는다. 일상 생활에서는 형이상학이나 종교를 그다지 중요시하지 않고, 오로지 검증이 가능한 증거에 의지하여 여러 가지 문제를 풀려고 하는 사람을 실증주의적인 사람이라고 한다.
실증주의의 역사적 배경
16세기~17세기에는 정치적 절대주의와 로마카톨릭의 동맹에 세워졌던 신학적 절대주의가 각종 자연과학과 역학등의 등장으로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사회사상, 정치사상, 국가론, 사유방법등에도 변화가 있어났다. 이러한 학문이 발달하자, 과거에 종교적 가치와 독단, 신념을 바탕으로 자연현상을 쉽게 설명했던 것이 신학적 절대주의 붕괴와 함께와 “회의주의”가 중세시대의 비유적인 세계상을 대신하게 됐다.
실증주의의 지식적 배경
실증주의 지식적 배경에는 두명의 철학자를 빼놓을 수 없다. 프란시스 베이컨과 르네 데카르트를 말할수 있는데, 우선 프란시스 베이컨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경험주의를 계승하여 경험, 실험, 귀납법, 관찰 등을 옹호 했다. 다시 말해서 중세시대에 배척받던 스콜라주의의 선 시험적 방법을 인정한 것이다. 후에 경험주의 철학자들은 베이컨의 사상을 기초로 하여 지식의 추구가 직접적인 감각경험에서 출발한다고 주장했다.
다음으로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는 르네 데카르트에 대해 말하자면 플라톤의 합리주의 전통을 계승하고 도입하였다. 또한 단순한 회의주의를 극복하고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연역도식을 주장하였고,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쯔 등 합리주의 철학자들과 같이 실험과 관찰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전재들로부터 논리적 연역을 강조한인물이다.
마지막으로 이 사람들의 닮은점은 귀납쪽에 무게를 실을것이냐, 연역에 의한 가설을 어느정도 상정하는지 차이일뿐, 두사람 모두 실험과 관찰을 강조한다는점이다.
꽁트의 실증주의
실증주의 대표적 철학자로 꽁트를 말할수 있다. 꽁트의 실증주의의 핵심은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하라!”라는 말이다. 이러한 실증주의는 훗날 사회과학에 지침이 되었고, 실증주의에대한 역사이론을 지식의 진보가 곧 역사적 변동이라 생각했다. 또한 실증주의의 철학적 임무는 과학적 지식의 궁극적인 종합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지식이론은 과학이 구성하는 이론적 법칙은 확고한 경험적 관찰에 근거하는 엄밀하고 확실한 방법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고, 즉 지식은 오로지 경험적 증거로 부터만 도출됨을 강조한 것이다.
데카르트 철학
데카르트의 철학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일반적인 사고방식에 끼친 영양도 지대한 바가 있다. 데카르트의 말은 서양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를 전체적 유기체가 아니라 그의 마음과 동일시하게 이끌었던 것이다. 이러한 데카르트적인 분할과결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 자신을 육체 속에 내제하는 고립된 자아로서 인식하게 된 것이다. 마음은 육체 속으로부터 떨어져 나왔으면 그 육체를 통어해야 한다는 헛된 과업이 주어지게 되고 의식적인 의지와 무의식적인 본능 사이에 갈등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개인은 그의 활동이나 재능, 감정, 신앙 등에 따라서 수 없이 쪼개진 많은 분야로 더욱 분열되어 갔고, 이것은 한 없는 갈등을 일으켜 형이상학적인 혼란과 좌절을 끝없이 유발시키는 것이다. 이처럼 내적 분열은 외부세계를 제각기 분열된 대상과 사건의 집합으로 보는 관점을 반영하는 것이다. 자연 환경은 제각기 다른 이해 집단에 의해 착취되는 따로 떨어진 부분들로써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취급된다. 하지만 데카르트 철학에서도 도덕의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는가 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런 의혹이다. 데카르트의 도덕적 문제점을 생각해보면, 데카르트의 관점은 확장되어 다른 국가, 인종, 종교, 정치 집단으로 분열된다. 이러한 분열은 우리자신이나 우리의 환경이나 우리의 사회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분열과 이것들이 정말 다른 조각들이라고 믿는 것이야 말로 오늘날 일련의 사회적, 생태적, 문화적 위기의 근본이유라고 여겨졌고, 그런 것들이 우리를 자연과 다른 이들에게 소외시켰다. 그것은 자연자원을 대단히 부당하게 분배시켜 경제적 무질서를 야기하는 것이고 다시 말해서 폭력은 우발적이거나 제도화 되어서 밀어닥치고 있으며, 더럽게 오염된 환경속에서 생명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병들어가고 잇는것이다. 사실 그 많은 데카르트 연구가들에게서 조차 윤리.도덕의 문제에 초점을 두고 그를 고찰한 이는 별로 눈에 띄지를 않기 때문이다. 그가 철학의 방법적 탐구에 열중하고 그것을 통해 유독 빛나는 철학사상의 위치를 점유했다는 건은 틀림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방법적 의심을 전반적으로 적용할수 있다는 사실은 곧 인간의 자유를 전제로 하며 이 자유의 인식이야말로 하나의 본유관텀이기도 한 것이다. 그의 명증적인 기본 명제인 Cogito, ergo Sum 이라는 것은 근본쏘여로서의 자유의지가 선행되지 않고는 획득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극단적인 의심의 작용속에 뛰어드는 것은 자유에 속한 일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를 창조한 이가 누구로 밝혀지건, 또 그가 비록 전능하면서도 기만적인 존재로 입증이 된다 할지라도 우리가 거기 대해 확실한 인식을 갖지 않는 것들을 논란의 여지가 없는 진리로서 받아 들이기를 삼가할수 있도록 하는 어떤 자유를 우리는 역시 경험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누구나가 자연히 인간이 자유임을 자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고로, 인간이 자유임에 대해 우리는 확신을 가지는바, 이같은 확신은 신존재에 관한 확신보다도 논리적으론 선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신의 존재가 증명된 이상, 신에 관해 우리가 알고 있는 바이 비추어 인간의 자유는 다시 검토를 받는 일이 필요해진다 왜냐하면, 신은 영원으로 부터 존재하는 것이어서 현재를 알고 또 미래를 예정하고 있음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자유가 신의 예정과 어떻게 화해될수가 있는가의 문제가 야기된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여기에 얽힌 신학적 논쟁을 회피하려는 의도에서였던지 이 문제의 적극적인 해결을 기도하는 것 같지가 않다. 인간의 자유에 대한 우리의 화신과 신의 전능성에 대한 우리의 명석판명한 인식사이에 개재하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지어야 할것인가? 데카르트에 충실한다고 하면 이런 문제의 해결은 우리의 오성능력을 벗어나는 것이 되리라고 본다. 그래서 그가 (철학원리)에서 제시하는 해결책은 우리의 사고의 유한성과 신의 무한성을 구분하는 것으로 처리될수가 있다는데 그칠 뿐이다. 즉, 신은 인간의 모든 행동을 예견하고 예정하나 인간의 의지를 결정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인간의 세계와 신의 세계는 하등의 마찰과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 공존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신은 인간이 그것을 수행하고자 하는 까닭에 그의 자유로운 행동을 예견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신이 그것을 예견하기 때문에 인간이 그것을 수행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결정론과 자유의지의 문제를 건드리는 이 지점에서 데카르트가 신의 예정과 인간의 의지적 행동과의 충돌을 이토록 회피하는 방향에서 처리하고 있다는 것은 순수 철학적인 이론의 영역을 넘어 그 시대와 사회의 승인된 관렴과의 화해를 이룩하려는 철학자 개인의 의지가 크게 작용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 것이다. 이점, 그 뒤를 잇는 두 사람의 합리주의 철학자들, 즉 스퍼노자와 라이쁘니찌에 관련시켜 볼 때 그가 양자의 사이에 위치한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말하자면 당시 교회의 교조적인 주장에 정면으로 충돌, 험난한 생애를 감수하는 스피노자와 현실순응 내지 현실 찬미의 콘포미스트가 되는 라이쁘니찌와의 중간 위치이다 그가 도덕 문제에 별반 관심을 가졌던 것이 아니라 자연철학에 열중했다고는 하지만, 이 자연철학 부문에서조차 그 결론이 교회의 주장과 어긋난다고 보여질 경우엔 서슴지 않고 발표를 삼가했다고 하는 사실은 아이러니칼하게도 좀더 깊은 의미에서 도덕적, 실천적인 문제를 표출한 것이 아닌가 한다. 우리는 갈릴레이적 문제성을 여기서도 분명히 목격하는 까닭이다. 사실에 있어서 데카르트의 관심사는 오직 인간으로서 과오를 범하지 않는 문제에 집중되었다고 할 것이다. 즉 그는 의심의 여지가 있는 경우의 명제에 대하여 동의하지를 않고, 또 동시에 한 명제의 진(眞)이 확실시 될 때 어쩔수없이 동의하지 않을수 없는 인간의 자유를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가 자유롭게 과오를 받아들이거나 거절하거나 하는데서 신의 책임을 벗어나게 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어쨌든 인간의 자유가 이와같이 전제된바에야 적어도 도덕론이 설수 있는 자리는 마련되었다고 보겠다. 사실 데카르트는 학문 전체의 통일성에 대한 비젼을 가졌었으며 이를 지식의 나무 상(像)으로 표현한바 있었다. 즉 그 뿌리는 형이상학이요, 줄기는 자연학, 그리고 가지들은 기타 제반과학, 의학 도덕 등의 학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계획대로 한다면 참다운 도덕학의 구상이 분명 있었다고 할수 있겠으나, 실제로 이 문제를 만족스럽게 다룬 곳이 그에게서는 좀처럼 발견되지를 않는다 만년의 (정념론)에 윤리문제에 관련된 단편적 취괍이 눈에 띄일 뿐, 그 주제의 충분한 전개가 이루어진 것은 없다. 결국 그는 심신 분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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