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제국과 중화제국의 딜레마의 이해와 중화제국 질서의 동요를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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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중화제국과 중화제국의 딜레마의 이해와 중화제국질서의 동요를 이해-
1. 중화제국이란?
중국에는 예로부터 가운데의 중화(한족)와 바깥의 이적(한족 이외의 민족)을 중화의 예, 의, 유무(=문화의 유무)에 따라서 구별하는 사고 방식이 있었다. 10세기를 경계로 장성 내의 한족 세계와 북아시아 및 동북아시아 세계의 긴밀화가 한층 현저해졌다. 즉 이것은 화이의 긴밀화이다. 그렇다면 중국 내지 지배를 기반으로 하는 복합 다민족국가의 형성이 진전되면서 화이를 구별함에 있어 중화사상에 관한 문제가 대두하게 된다.
다시 한번 송, 대명과 대원, 대청에 대해 생각해보면, 그 지배 영역 내에 한족의 농경 세계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된다. 그러나 송과 대명은 중화 세계의 한족이 통치자인 것에 비해서, 대원과 대청의 경우 지배자가 북아시아 및 동북아시아의 민족이라는 점에서는 이질적이다. 거기에는 지배 민족의 전통적인 정치기구나 경제 구조 등의 차이에 따른 다양한 지배권 문제와 함께 본래는 중화와 대립되는 외이가 중국 황제로서 중화 세계에 군림함으로써 발생하는 중국 화이사상에서의 정통성을 둘러싼 문제가 내포되어 있다.
중화 백성의 ‘중화’를 이적에게서 회복하고, 명조 아래에서 새로운 ‘중화세계’로서 중국을 재생한다. 이것이 ‘중화’의 천자인 주원장에게 부여된 큰 과제였다. 명 홍무제 시대에는 중화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천명사상과 화이사상 중에서 천명사사에 기초한 군-신-민-의 천하질서가 특별히 강조되었고, 3대 영락제 시대 화이사상인 화이질서의 확립이 철저하게 추구되었다. 천명사상과 화이사상의 행동을 규정하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중화사상의 논리이며, 그들은 그 세계 속에서 질서의 재확립을 도모하고 있었다. 그 결과 영락 시대의 동아시아에는 명을 중심으로 정치와 경제가 일체화한 대단히 유기적인 시스템이 창출되었다. 여기에서는 중화와 이적의 관계가 질서화되고, 조공무역에 의한 이윤을 핑계로 화이질서의 유지가 추구되었다. 확실히 중화의 압도적인 정치력과 경제력을 기반으로 중화 독존의 통제적이면서 개방적인 세계가 구상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세로운 중화 세계의 중국을 재생하려는 명조의 시도는 영락 시대 동아시아에 북경을 중심으로 하는 중화 ‘세계시스템’ 을 만들어냈지만, 결국 몽골을 편입하지 못함으로써 중화질서의 통합은 완성할수 없었다. 하지만 명을 이은 청조에 이르러서 새로운 중화 세계 시스템이 완성되었다. 이로 인해 이전부터 이뤄져 왔던 조공체제의 확립과 함께 새로운 영토의 번화로 인해 더욱더 중화주의가 확고해진다. 청조는 명조가 편입 하지 못했던 몽골족 세계뿐만 아니라 티베트족 세계, 이슬람 세계의 일부인 위구르족 세계까지 판도를 넓혔다. 게다가 직접 통치하에 있는 ‘기=만’ , 한(중국 내지), 과 간접 지배하에 있는 ‘번(몽골, 티베트, 신장 위구르)’ 으로 이루어진 중국을 완성했다. 이전의 중화(명조)가 달성하지 못한 화이질서 통합의 꿈을 실현한 청조야말로 통일 다민족 왕조였다. 주나라의 천명사상부터 시작됬다고 볼수 있는 중화사상의 완성은 청조인것이다. 청조는 수당시대부터 있어왔던 조공체제를 정비하고, 새로이 확장한 번지역을 굳건히 하면서 중화주의의 완성을 추구하였다. 자세한 과정은 본론에서 알아보기로 하고, 먼저 간단히 번체제부터 살펴보자. 몽골 지역과 신장 위구르, 그리고 티베트 그리고 만주를 포함한 지역이였다. 지금 현재와 비교하면 몽골을 제외하고는 여전히 중국 영토로 인식되면서 소수민족 탄압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지역들이다. 신장 위구르 지역의 동투르키스탄 분리 운동, 티베트는 라마교 탄압, 만주의 조선족등이 그 예이다. 그리고 조공체제의 대표적 예는 조선, 일본, 류큐, 시암, 베트남 등 동아시아의 국가들이였다. 중화제국의 완성은 조공체제와 번 체제에서 나타났다. 하지만 이들 역시 서구 제국주의 세력의 영토 확장 정책으로 인해 와해되고, 중화주의 역시 붕괴해간다. 이번 발표 주제가 중화주의와 그 딜레마와 붕괴로 인해 무너져가는 중국 근대사를 알아보는 것이다.
청나라는 건국이후 명의 뒤를 이어 그 판도를 넓혀나갔는데 강희제-옹정제-건륭제 시기를 거치며 기존의 중원에서 신장과 내.외몽골, 티베트 지역을 장악하게 된다. 청조는 내지를 18개 성으로 나누고 최말단 행정단위에 1300개의 현을 두어 20~50만 단위로 설치하고 한족인 순무와 만주족 총독을 파견했다. 내지 이외의 새롭게 편입된 지역에 대하여서는 청나라 조정에서는 이들에 대하여 번부라고 칭하고 특수행정기관인 이번원이 설치되는데 이번원은 본디 몽골족 통치를 위해 설치되었던 기관이 건륭제 후반기에 번부 전체를 통괄하는 기관이 되었다. 여기에 통치를 위해 현지 장군, 도통, 대신등이 파견되었고 중앙이번원과 대등한 관계에 있었다.
청조는 복속된 국가들에 대하여 만(만주), 번(티벳,몽골,신장), 한(중국)으로 대표되는 행정적으로 다른 정책을 펼쳤는데 몽고는 내몽고(막남), 막북, 막서 3대 부족으로 나눠져 있었는데 청나라 입관후 내몽골이 복속되고 강희제때 준가르부 추장을 완전히 복속된 이후에 군을 파견하여 군사적으로 지배하면서 동시에 행정적으로는 간접적으로 지배를 하였다. 350만 몽골인에 대해 청조는 내몽골지역은 직접적으로 관리하고 외몽골지역에 대하여서는 간접적으로 지배했다. 그리고 몽고에는 맹기제를 시행하여 부족장이 이번원의 지시를 받아 지배하는 형식으로 통치하여 몽고인의 풍습을 인정하여 몽고지역의 지배를 안정화하였고 혼인정책을 실시하여 정치적 연맹관계를 돈독히 하였다. 동시에 몽고의 전통적인 샤머니즘 대신 라마불교를 장려하여 몽골남성의 40%가 승려가 되어 인구는 늘지 않았다. 하지만 한인인구의 유입의 증가와 더불어 교역과 고리대를 통한 수탈은 한인과 몽골인의 갈등을 유발했다.
티벳은 17세기까지 청과 대등한 관계에 있었고 달라이 라마는 종교적으로는 오히려 상위에 있었다. 18세기 들어 준가르부가 티벳에 내정간섭을 하자 달라이 라마 5세는 준가르의 영향하에서 몽고에 대해 종교적인 영향력을 확대하여 몽골과 연계하여 청을 견제하려 했으나 강희제는 1708년 관리를 파견하고 1720년에는 달라이라마5세와 준가르를 축출하고 티벳의 통치권을 인정해줬다. 이후 청의 간접적 지배하에 들어갔고 건륭제때 청은 주장대신을 파견하여 청 조정에서 모든 티벳지역의 정치, 외교, 경제, 달라이라마 후계자 선출까지 직접 명령하여 처리하게 하였으나 라마교가 서장과 몽골의 정신적으로 지배했기 때문에 승려들에게 특권을 주며 적극적으로 회유하여 통치하였다. 그리고 황제는 달라이라마를 보호하여 라마교의 보호자로 자처하여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했다.
신장은 천산산맥에 위치한 무슬림 국가로써 섬서, 감숙성 등에 군사적인 위협이 되는 지역으로 1745년까지 여러차례 전쟁을 벌였으나 정벌에 실패하고 1745년 이후 칸의 자리를 놓고 신장 내부에서 내란이 벌어지자 1755년 정벌에 성공한다. 청조는 1762년부터 이 지역에 1~2만의 주둔군을 파견하고 신장의 토착요소를 결합하여 군정합일의 행정기구인 군부를 설치하고 일리지역에 장군을 파견하여 군사 및 민정업무를 담당하게 하였고 그 휘하에 총독과 각급대신을 파견하여 각 방면의 업무를 처리하고 상당수의 군사를 파견하였다. 그리고 신장 지역에 다양한 민족이 사는만큼 각 민족이 사는 지역마다 다른 형식의 지배방식으로 통치하였고 신장의 통치체제인 벡 제도를 통하여 신장 인을 지배하여 신장 지방의 안정을 가져왔다. 이러한 각 지역에 알맞은 통치체제와 어느정도의 자치는 청의 안정적인 번 체제와 건륭제때 최대판도를 형성했다. 그리고 청의 근거지이자 발상지인 만주에 대하여서는 특수지구화하여 봉금정책을 펼쳐 한인과 조선인, 러시아인의 이주를 금지하였다. 따라서 만주 지역이 비게 되었는데, 부동항을 찾아 나섰던 러시아 제국 세력이 시베리아를 경유하여 동진을 계속하게 되는 과정에서 청제국과의 충돌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당시 황제인 강희제는 러시아 제국과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이 분쟁은 1989년 네르친스크 조약과 1727년 카프타 조약으로 결착을 보게 되었고, 이로 인해 청대의 최대 판도를 중심으로 팍스 시니카 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이후 만주 지역은 러시아인의 진출과 조선인의 범월이 잦아지면서 만주를 인구가 희박한 상태로 두는 것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18세기에 들어와 청조는 한족 이주에 대해 금지와 방임의 이중적인 정책을 폈고, 그 결과 만주 인구는 급수적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청조는 주변국가들에 대해 이전의 중국왕조와 마찬가지로 조공체제를 통하여 중화제국적 세계질서를 유지하려 하였으며 사절을 따라 온 상인단은 중국상인과 교역하는게 허가되어 서로 앞다투어 중국과 가까운 조공국이 되려 하였으며 조선과 미얀마, 시암, 베트남, 네팔, 일본은 조공체제 안에서 동아시아적 질서체제를 유지해 나가는데 특히 조선은 청 태종의 침공이후 청에 있어 가장 중요한 조공국이 되었고 청은 조선을 다른 조공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우대하였고 조선은 청을 통해 경제적 부를 획득할 수 있었다.
건륭제는 십전무공이라 할 정도로 왕성한 정복군주로 청나라 최대 판도를 만든 황제지만 지나친 정복전쟁과 화신으로 대표되는 관리들의 부정축재는 결국 백련교도의 난과 같은 반란이 할거하게 되고 가경제때 청나라가 몰락으로 접어드는 원인이 되고 만다. 게다가 건륭연간에 토지 겸병이 광범위하게 진행되었고 팔기군이 무력화되고 청국의 관리가 외국과의 교역창인 공행을 착취하면서 청조의 통치는 이완되기 시작한다.
명대부터 이어진 네덜란드와 포르투갈로 대표되는 유럽열강의 중국침략야욕은 결국1840년 아편전쟁으로 이어졌고 러시아와 맺은 네르친스크 조약이후 중국은 조약체제로 세계질서에 편입되었다. 이는 이완되어가는 청조의 통치의 붕괴를 가속화시켰고 더불어 외국세력이 중국을 반식민지화 하는 근거가 되게 되며 이런 조약들은 결국 태평천국의 난으로 이어지게 된다. 동시에 무슬림교도의 대대적인 반란은 신장지역이 번부를 이탈하게 하는 계기가 되는데 1865년에 야쿱벡이 신장 지역에 침투해 무슬림을 규합해 국가를 성립하고 러시아, 영국과의 통상조약 체결로 외교적 안정을 획득하게 된다. 하지만 1876년 좌종당은 야쿱벡 정권을 붕괴하고 77년에는 신장 전 지역을 회복하고 나서 러시아와의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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