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트리히 본회퍼의 생애와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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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트리히 본회퍼의 생애와 사상
1. 본회퍼의 생애
본회퍼는 1906년 독일 프로이센 브레슬라우에서 칼 본회퍼(Karl Bonhoeffer)와 파울라 본회퍼(Paula Bonhoeffer)사이에 팔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부친은 법률가 집안에서 교육받은 정신의학과 신경의학 교수였으며 외조부는 황제 빌헬름 2세 때 궁중 설교가였고 조부인 Karl-August von Hase는 교회사 교수를 지낸 독일제국의 엘리트 가정에서 성장하였다. 1920년(16세) 그는 음악과 종교에 관심이 많았으며 결국 신학의 길을 가겠다고 결심하고 튀빙겐에서 신학 공부를 시작하였다. 1924년(18세) 베를린 대학으로 옮겨 A. Harnack, H. Litzmann, E. Sellin, K. Holl, R. Seeberg 등에게서 배웠고, 이 기간 동안 루터 계열의 전통신학을 주로 홀(Holl)에게서 소개 받았으며, 라인홀트 제베르크의 지도로 박사학위 논문 보고서를 제출하였다.(1925-1926 겨울학기), 논문의 주제는 1927년 8월에 통과된 "성인들의 통공 혹은 성도의 교제(Sanctorum Communio): 교회 사회학에 대한 교의 신학적 고찰"이다. 1927년(21세) 교회의 본질에 대한 문제를 추구하던 그는 하르낙을 비판하며 칼 바르트(Karl Barth, 1886.5.10∼1968.12.9)의 변증법적 신학에 매료되었다. 1928년(22세) 스페인의 바로셀로나에서 독일인들을 위한 교회의 Vikar(전도사, 부목사)로 일하였고 1929년(23세) 베를린으로 돌아와 교수 자격논문(Habilitationsschrift)을 제출하였다.(행위와 존재Akt und Sein: 조직신학에 있어서의 존재론과 선험철학) 1930-31년 교환학생으로 미국 유니온 신학교에서 연구하였으며 Reinhold Niebuhr와 J. Baillie, P. Lehmann을 만났고, 이런 해외 경험을 통해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뉴욕 할렘가의 흑인 문제를 보며 인종차별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특히, 지성과 직감이 한데 어우러진 흑인 공동체 예배를 통해(할렘의 교회) 개인적으로 해방감을 체험하게 되었다.
1931년(25세) 다시 베를린 대학교로 와서 조직신학 강사로 임명되었고 1936년 나치 정부에 의해 쫓겨 날 때까지 베를린 대학교 강사로 지냈다. 이 때「그리스도론」,「창조와 타락」,「교회의 본질」등을 강의하였다. 영국 켐브리지에서 열린 "교회를 통한 국제적 우호관계를 증진시키기 위한 세계 연맹"의 유럽 청년부 간사가 되어 에큐메니칼 운동을 통해 다른 나라 그리스도교인들에게 독일교회가 벌이고 있는 투쟁의 중요성과 히틀러의 진상을 자유세계에 알렸다.
1933년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가 권력을 장악하고 총통에 취임하자 본회퍼는 즉시 라디오 강연(2월 1일)을 하였고 "지도자와 젊은 세대"라는 제목의 글에서 스스로 신성화하는 지도자의 직위는 신을 모독하는 것임을 말하던 중 강연이 중단되었다. 그 후 나치의 감시를 받게 되었고 여름에 베를린 대학에서 기독론을 강의하던 중 제제를 받아 3부는 강의하지 못하고 이후 영국 런던에 가서 18개원 간 목회를 하게 된다. 영국목회 활동을 통해 본회퍼는 독일 밖에서 독일교회의 반히틀러 투쟁의 대변인 역할을 하였다. 특히 덴마크에서 열린 W.C.C. 회의에 독일에서는 히틀러를 지지하는 독일 기독교회만이 참여했는데, 본회퍼는 이 곳에 참여하여 W.C.C.가 "독일 기독교회"를 정죄하고 고백교회(Confessing Church)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돌아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935년(29세) 본회퍼는 영국에서 간디의 친구이자 전기 작가인 C.F.Andrews를 알게 되었고, 그의 소개로 간디의 비폭력적 평화주의를 배우기 위해 인도로 갈 계획을 세웠지만, 1935년 4월 고백교회 총회로부터 긴급 부름을 받아 귀국, 발틱해 근처에 있는 Zingst에서 25명의 목사 후보생을 돌보는 신학교의 책임자로 부름을 받았다. 본회퍼는 이 신학교에서 특수교육의 과정을 만들고, "형제의 집"(Bruderhaus)이라고 불리우는 집에서, 귀국하기 전 몇몇 수도원과 신앙 공동체들에게서 배운 내용들을 토대로 공동생활, 강의, 기도와 명상, 죄의 고백 등의 교과과정을 실시하였다. 그는 이 기간을 자신의 생애에 가장 만족한 시간으로 회고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신학교는 결국 1937년 게쉬타포(Gestapo)에 의해 폐쇄되었다. 이 핀켄발데 신학교에서 강의하였던 내용이 후에「나를 따르라」(Nachfolge, 1937), 「성도의 공동생활」(Gemeinsames Lesen, 1939)이라는 책자로 발간되었다.
1939년(33세)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고(1939-45), 라인홀드 니버와 폴 레만은 본회퍼를 미국 유니온 신학교로 초빙, 뉴욕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본회퍼는 독일에 있는 형제들에 대한 생각으로 항상 번민하던 중 미국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니버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저는 독일의 기독교인과 더불어 우리 조국의 이 어려운 시기동안 내내 함께 살지 않으면 안됩니다. 저의 동포가 함께 이 시대의 시련을 나누지 않는다면 전쟁 후 독일에서 기독교인 삶의 재건에 참여할 권리가 없을 것입니다."), 결국 그는 1940년(34세) 미국을 떠나 독일로 돌아와서 매형인 한스 폰 도나니(Hans von Dohananyi)의 도움을 받아 저항운동에 가담하게 된다. 도나니는 독일 군 정보부의 정보부장 부관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그의 도움으로 정보부가 채용한 민간인의 요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곧 히틀러 암살 음모는 그의 매형 및 고위층의 반 히틀러 세력들이 군 정보부와 더불어 시도했던 것인데, 본회퍼도 여기에 적극 참여하게 된다. 그는 "미친 사람이 모는 차에 희생되는 많은 사람들을 돌보는 것만이 나의 과제가 아니다. 이 미친 사람의 운전을 중단시키는 것도 나의 과제이다." 라는 말로 자신의 입장을 표명했다.
1943년(37세) 마리아 폰 베데마이어와 약혼하였고 이후 본회퍼와 도나니는 혐의를 받고 게쉬타포에 의해 체포 수감된다. 본회퍼는 테겔 형무소에 수감되어 18개월을 보냈는데, 이 기간 중 베트게에게 보낸 편지가 사후에「저항과 복종」(Widerstand und Ergebung)으로 출판되었다.
1945년 나치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4월 8일 이른 아침에 저항에 참여한 그의 가족 3명을 포함한 5천명의 사람들과 함께 교수형을 당한다. 3주 후 히틀러는 자살, 5월 8일에 독일이 항복하게 된다. 그의 사후 50년만에 베를린의 한 법정에서 독일의 양심 본회퍼 목사를 복권시켰다. (복권판결의 이유: 본회퍼는 결코 국가를 위태롭게 한 적이 없고 오히려 나치의 폐해로부터 국가와 국민을 구출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2. 본회퍼의 사상
디트리히 본회퍼는 그리스도를 증거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자기의 신앙에 따라 그 고백한 신앙을 실천에 옮긴 실천적 삶을 산 기독교인이었다. 따라서 그의 삶은 세상 속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책임과 교회의 역할을 일깨워줬다. 신학계에서 처음으로 책임윤리를 말한 본회퍼는 그의 신학과 삶을 통하여 신앙과 행동, 개인의 종교적 경건과 정치적 책임이 결코 분리되지 않고 일치해야 함을 실제로 보여줬다. 히틀러의 힘이 독일의 모든 계층과 사회질서를 장악했을 때 독일의 양심적 지식인과 신앙인들은 히틀러에 항거하다 감옥과 집단수용소, 사형장으로 끌려갔고 이 때 본회퍼도 히틀러를 ‘적그리스도’로 보고 저항의 깃발을 들었다. 본회퍼는 교회가 박해받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적극적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촉구하면서 “유대인을 위하여 소리치는 자만이 그레고리안 찬가를 부를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 본회퍼의 신학은 철저하게 그리스도 지배적이며 교회 중심적이다. 그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일치시켜 “교회(공동체)로서 존재하는 그리스도”라고 말하였다. 본회퍼는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 우리에게 있어 누구인가”를 질문하며 그가 찾은 답은 “예수 그리스도는 타자(他者)를 위한 존재’라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타자를 위한 존재라면 교회도 역시 ‘타자를 위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1·2차 세계대전을 통해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은 한계에 봉착하였고 20세기 초에는 계시와 이성의 위기적 관계가 대두되며 계시와 이성, 교회와 세상, 신학과 철학을 분명히 구분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와중에 본회퍼는 "세상 속에서의 타자를 위한 그리스도인적 삶"을 강조함으로서 이러한 이분법적 관계를 넘어서고 있다. 그래서 본회퍼는 초기 작품인 <성도의 교제>에서 교회의 사회적 성격을 강조하였고, <나를 따르라>에서는 교회의 정체성과 세상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여 이 둘을 배타적 관계로 보면서도, 교회가 수행해야 할 제자직을 말하면서, 이 세상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는 성화를 강조하였다. 후기 작품에 속하는 <윤리학>과 <옥중서신>에서는 교회와 세상의 적대 관계보다 교회가 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의 모습을 부각시키는가에 관심을 가졌다. 따라서 본회퍼에게 그리스도는 초기 교회의 모습으로 실존한다는 생각을 넘어서서, 예수 그리스도는 비종교적 세속적인 세상의 주님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의 저서에서 나타나는 사상에 일관되게 흐르는 것은 "그리스도 중심적 사상"이다. 그리스도론은 본회퍼 신학에서 기본사상이며 그 근간을 이루고 있다. 그의 모든 사상은 그리스도와 연관되어 있다.
본회퍼는 하나님 현현의 세 가지 형태, 즉 설교, 성서, 예수 그리스도 속에는 그리스도의 인격(Christusperson)이 계시되었다고 봄으로서 말씀을 존재론적으로 해석한다. 왜냐하면 본회퍼에게 있어서 존재(ist)는 단지 "있음(es gibt)"이 아니라 "행위(in Akt)" 속에서 인식되어야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 곧 로고스라는 것은 본회퍼의 [그리스도론(Christologie), 1933]에서도 지배적으로 나타난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자유 안에서 말씀으로 자신을 계시하신다. 왜냐하면 인간도 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말씀하시는 로고스 안에서 인간과 만나시기로 결정하셨다. 인간의 로고스 안으로 하나님의 로고스가 들어오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이다. 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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