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의 국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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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고려시대의 국자감
1. 국자감 중국의 국자감-역사문화 관광지로 유명한 국자감은 한나라 시절 가장 높은 학부인 태학(太)으로, 진나라 때는 국자학(子)으로, 당나라 때 처음으로 국자감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베이징의 국자감은 원 대덕(大德) 10년(1306)에 지어져 현재까지 7백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으며, 원명청나라 3나라에 걸쳐 국가 최고의 학부 및 교육행정관리기구로 유명했다. 명나라 초기에는 북평군학(北平郡)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영락(永) 2년(1404)년에 다시 국자감으로 호칭이 돌아갔다. 광서(光) 31년(1905)년에는 학부(部)를 세우고 국자감을 없앰으로써 국자감의 역사적 사명에 종언을 고했다.국자감은 고대 중앙대학으로써 국가적 차원에서 대대로 중시를 받았으며 여러번의 수리 및 복원을 거쳤는데 특히 명 영락(永), 정통(正) 연간에 각각 대규모 수리작업을 거쳤으며, 청 건륭(乾隆) 연간에는 증축 작업을 통해 총면적이 2만 7천 평방미터가 넘는 지금의 건축 규모 및 구조가 형성되었다.
의 유래
고려의 초기 교육은 신라의 제도를 이어 받았으나 그 체제를 갖추지 못한 채 운영되고 있었다. 그 체제의 기틀을 잡은 것은 제6대 성종(981년~997년)이었다. 그는 태조로부터 이어져 오던 권학정신과 사업을 이어받아 수도의 관학을 종합대학으로 발전시켰다. 『고려사』에는 성종 11년(992년)에 “왕이 학교를 세우라는 교서를 내리고, 유사(有司)에게 승지(勝地)를 얻게 하여 학사와 서재를 넓게 만들고, 전장을 급여하여 학자(學資)를 충당케 함으로써 국자감이 창립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국자감은 국왕의 명령에 의해 국가적인 대학으로 건립된 것이다.
2. 국자감의 체제
국자감은 신라의 국학을 이어받은 고등교육기관이었으나 고려는 그 제도를 당나라의 것에 의존했다. 신라와는 달리 국자감에는 국자학, 태학, 사문학, 율학, 서학, 산학 등 6학의 분과가 있었으나, 국자학, 태학, 사문학 등의 3학은 모두 유교의 경전과 문학을 전공하는 곳으로 고등관리의 양성을 위한 기관이었고, 율학, 서학, 산학 등의 3학은 일종의 직업학으로 각기 전문직에 종사할 관리를 양성하기 위한 기관이었다.
입학자격은 각 학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국자학은 문무관(文武官) 3품 이상의 자손, 태학은 문무 5품 이상의 자손, 사문학은 문무관 7품 이상의 아들을 입학하게 했다. 율학, 서학, 산학은 8품 이상의 아들 또는 서민의 자제 및 7품 이상의 아들로서 원하는 자를 입학하게 했다. 국자감의 입학자격은 신분에 따라서 차등을 두었으며, 기술계 교육은 유학계에 비하여 신분이 낮은 사람을 대상으로 했다. 따라서 사실상 이러한 구분은 신분의 차이에 의한 것일 뿐 학문내용의 차이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국자감의 학생정원과 교육연한은 시대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었다. 인종 때의 학식(學式)에서는 삼학에 각 300인으로 정하였다. 그러나 입학정원은 항시 미달 상태였다. 유학계의 삼학은 60~70인 내외였고, 공민왕 때에 약 100명이 되었다. 기술계 삼학도 60~70명 정도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국자감의 교육연한은 유학계가 9년, 기술계가 6년이었다.
교과의 운영은 박사와 조교가 각기 경서를 분담하여 교수했다. 일경(一經)을 교수하면 종강하도록 했는데, 종강하지 못한 자는 개업(改業)하지 못하게 했다. 연말의 계강(計講)을 통해 박사와 조교가 고과(考課)하게 하였다.
3. 국자감의 쇠퇴
성종 14년(995) 2월 내린 교서를 보면 ‘언제나 글 공부를 해야 하는 선비들이 한번 과거에 통과한 뒤에는 공무에 바빠서 글을 폐하는 것을 나는 근심한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나이 50세 이하로서 아직 지제고(知制誥)를 지내지 못한 자들은 한림원에서 글제를 내어 매월 시 3편, 부 1편씩 지어 올리도록 하고 지방의 문관들은 자체로 글제를 내어 일 년에 시 30편, 부 1편씩 지어 계리(計吏)에게 올려 보낼 것이며, 한림원에서는 그것을 고시하여 나에게 보고하라’ 고 하였다. 이것은 과거에 합격한 관리의 교사화를 기한 것이었다. 사실 이들은 공무를 마치고 퇴근하여서는 실지로 학생들을 사숙에서 가르쳤던 것이다. 이것은 다시 국자감의 쇠퇴와도 관련되어 있다.
성종때부터 그렇게 흥학책을 독려하였으나 과거급제자수의 감축과 그로 인한 여러 가지 통제는 관학의 쇠퇴를 가져 오게 되었다. 현종대에 두 번에 걸쳐 있었던 거란침입과 이에 다른 국내정세의 불안도 있었으나 과거정책의 전환이 더 큰 원인이었다. 중앙귀족들의 압력으로 향공이나 향공의 주류였던 국자감생들의 관계진출을 막으려 하였고, 명문대가의 자제들은 이 곳에 들어오기를 꺼렸다. 시설도 자기 집보다 못할뿐더러 교수 또한 그러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정종2년 입학 후 만 3년이 지나야 국자감시에 응시할 수 있도록 하는 규정이 마련되자 이러한 현상은 국자감을 더욱 기피하게끔 하였다.
▶ 참고자료 ◀
박재문, <한국교육사>, 학지사, 2001
서의식 외, <뿌리깊은 한국사>, 솔,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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