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문명의 비밀 영광의 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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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문명의 비밀 - 영광의 로마
지중해 서기 2세기 로마제국이 가장 융성하던 시대였다. 당시 세워진 웅장한 건축물만큼 로마제국의 힘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도 아마 없을 것이다. 로마 제국은 전성기가 극에 달했을 때 세계대륙의 스무 개의 인종과 무려 500개 이상의 도시를 점령했다. 로마는 점령지엔 반드시 건축물을 세웠다. 로마식 건축양식은 이탈리아에서 스페인, 프랑스에서 아시아, 아프리카와 북극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모든 도시들은 한결같이 웅장한 방식으로 지어졌다. 기둥과 주랑 시장과 사원들 공회당까지 말이다. 로마제국은 지중해 연안을 하나로 통일시켰고, 당시 수많은 문명들이 발원한 지역들을 에워싸면서 같은 법과 같은 생활방식, 같은 관습을 가진 단일 문명으로 통합시켜 나갔다. 이러한 시도는 인종과 문명을 구분하지 않은 하나의 거대한 다민족적 문화를 형성해 냈고, 이탈리아와 유럽인, 아프리카와 아랍인 황제들이 통치하기에 이르렀다. 로마가 어떻게 그 거대한 제국을 세우고 1000년이나 통치할 수 있었는지 알아보려면 문명의 황금기를 이루었던 로마제국 주변을 먼저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고대 문명의 비밀을 파헤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전설에 따르면 로마는 기원전 753년 로물루스가 세웠다고 한다. 로마는 곧 융성가도를 달리면서 제일먼저 이탈리아민족의 땅을 점령했고, 다음에는 이베리아 반도와 면한 대서양 연안에서 유프라테스 강에 이르는 드넓은 지역으로 왕성한 지배세력을 확장시켜 나갔다. 역사학자들은 서부 로마제국의 멸망을 서기 476년으로 잡고 있는데 이는 이 도시의 역사와 그들이 세계를 지배한 기간이 거의 1000년에 달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오래 지속될 수 있었을까? 해답은 로마인들이 단순히 땅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문화와 다양한 관습에 융화하면서 로마인들 최고의 문화를 접목시켰기 때문이다. 한때 로마의 지배지였던 프랑스의 데종라 로메인(Dzonglha Romane)에서 고고학자들은 인상적인 건물들이 늘어서있는 이 잘 닦인 도로를 발견했다. 도시 입구에서 과학자들은 이상한 홈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무엇에 쓰인 것들이었을까. 예기치 못한 토지를 접한 고고학자들은 간혹 중세서예가들이 전해주는 고대 건축에 관한 도면에서 중요한 단서를 찾아낼 수 있었다. 데종라 로메인에서 그 미스테리가 풀린 것 이다. 마을입구의 홈들은 당시 상인들이 물건을 진열하는 나무테이블을 지탱하는 것들 이었다. 길 양쪽을 따라 테이블을 놓고 상인들은 자신들의 상품을 최대한 잘 보이게 진열함으로써 더 큰 이익을 남겼을 것이다. 제국이 그렇게 오래 융성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매매와 교역이 활발했기 때문인 것으로 이해된다. 로마인들이 가는 곳이면 어디나 무기들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이는 훗날 ‘팍스 로마나(Pax Romana)’ 즉 로마의 평화를 상징했다. 새로운 안정기반위에서 상행위도 융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 팍스 로마나 - 지중해 세계를 제패한 고대 로마 지배 하에서의 평화의 시대 및 그 상태, 실제로는 피지배지역과 피지배자에 대한 제압과 착취 위에 성립한 평화에 지나지 않아서 오래 가지 않았다. ]
로마는 새로운 땅을 점령하고 주둔하면서 그 나라 최고의 병사들을 취해 자신의 군대에 편입시키는 전술을 자주 사용했다. 최고의 용병들은 대부분 부유한 집안출신이 많았다. 이들은 교육과 훈련을 잘 받은 젊은이들로 새로운 통치정부의 시스템을 통해 스스로 부상하려는 자연스러운 야심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전투에 승리하거나 정치적인 전쟁에 이기면 로마제국에서 가장 높고 부유한 계층인 원로원이 될 기회도 얻을 수 있었다. 높은 지위를 획득하는데 있어 화려한 군 경력은 큰 보탬이 되었다. 물론 신병들은 밑바닥에서 부터 시작해야 했다. 그들은 제국의 최동단 국경지대의 전장으로 보내지기도 했는데, 그곳은 트라잔 황제가 페르시아의 후계자인 파르니(Parny)와 맞서 싸우던 곳이다. 이들은 작은 함대를 몰고 프랑스에서 출발하여 지금의 마르세유인 마실리아를 거쳐 시실리 까지 이르는 먼 항로를 해적들과 싸우며 나아가야 했다. 이들은 시실리에서 가장 빠르고 안전한 항로를 따라 동양으로 계속 항해했다. 이는 연안을 따라 가다가 대양을 건너야만 가능한 방법이었다. 함대는 에게해를 지나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건너 마침내 시리아의 라디키아(Laudicea) 항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당시 전함들은 상선들과는 다른 점이 아주 많았다. 이 배는 트라이림(Trireme)이라 불리던 것이다. 배의 모습은 해양고고학자들이 발견한 유물에서 얻어진 정보를 토대로 알게 된 것이다. 학자들은 당시 전투에서 재빨리 적에게 다가가 제압하기 위해 전함에는 수십 명의 노 젓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 낼 수 있었다. 반면에 상선에서는 돛을 사용했고 인력은 쓰지 않았다. 전함들은 노 젓는 사람들의 숫자와 배열로 급이 매겨졌다. 트라이림에는 여러 쌍의 노 젓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각 두 명이 한조가 되었다. 이 배는 경량전함으로 길이가 약 35M에 빠르고 민첩한 편으로 해적들과 대항해 싸우는데도 완벽한 형태였다. 해군들은 노 젓는 사람들과 함께 배를 조종했고 여차하면 적함에 올라탈 태세를 갖추었다. 트라이림에는 각기 300명의 노 젓는 사람들과 100명의 군인들이 타고 있었다. 해적들이 들끓는 망망한 지중해와 에게해를 건너기 위해서 때로는 전함들은 적을 쫒아 수백 마일씩 추격전을 벌일 때도 있었다. 일단 적함을 나포하면 그 배로 올라가 격투를 벌이는 전략은 쓰지 않았다. 대신 불화살을 쏘거나 돌을 던져 침몰을 시키는 수법을 썼다. 때로는 배를 그대로 부딪치기도 했는데 더 넓은 면이 노출된 배는 상대방 배에 부딪치면 그 충격으로 침몰할 위험이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 투석기를 사용했다. 왜냐하면 파도의 높이에 따라 투사물의 각도가 두개의 다른 효과를 냈기 때문이다. 방어하는 배가 투석을 하면 배의 중심축이 수직으로 놓여있을 경우 발사된 투사물이 타원형을 그리면서 상대방의 배에 떨어지게 되는데, 이는 공격하는 배의 형태나 위치에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반면에 공격하는 배는 중심축에 맞추어 투사물을 쏘게 되는데 이때 발사된 투사물은 목표가 된 배에 최소한의 부분에 혹한된 원 안으로만 떨어지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었다. 공격자의 투사물이 목표를 벗어나는 경우가 발생하면서 전세가 갑자기 역전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한다.
병사들이 전쟁에만 동원된 건 아니었다. 로마문명은 식민지에도 자신들의 세련된 취향을 요구하고 있었다. 틴다리(Tindari)에 서있는 이 극장은 시실리 최동단 해변에 위치하는데 수많은 여행객들과 군인들이 잠시 정박하곤 하는 바다를 굽어보게 되어있다 이 구조물에서 가장 놀랍고도 흥미로운 점은 특이한 건축양식이나 마무리가 아니라 구조물의 위치이다. 눈부신 구조물이지만 왜 하필 여기에 지었을까? 극장이 바닷바람과 햇살에 그대로 노출된다는 것은 주로 공연이 낮에 이루어졌음을 감안할 때 더욱 의문이 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터키 페르가문(Pergamun)에 있는 또 하나의 극장도 까마득하게 높이 올려다 보이는 곳에 위치한다. 어쩌면 그것은 그리스해 취향일지 모른다. 모든 건축물에는 각기 무언가 장엄한 뜻이 있는 것이다. 다른 많은 도시들처럼 길게 기울어진 기둥을 가진 틴다리스 극장은 실제 로마인들이 지은 것이라기보다 몇 세기 전 헬레니즘 문화기의 그리스인들이 지은 것인데 로마인들이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문화로 흡수한 것으로 보인다. 로마제국의 크기나 세력이 그리스문화를 그대로 수용할 수 있었을 것이며 모자이크예술과 같이 오히려 모방과 발전을 통해 더욱 융성시킴으로써 제국 전체로 확산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 헬레니즘 문화기 - 넓은 뜻으로는 그리스정신 일반, 좁은 뜻으로는 고전 그리스세계 종말로부터 로마시대 성립까지의 시기에 그리스 고유문화와 오리엔트문화가 융합하여 이루어진 시기 ]
시실리 안쪽에는 발전하는 도시 모르간티나(Morgantina)가 있었다. 화려한 모자이크로 장식된 사치스러운 가옥들이 당시의 부를 증언한다. 도시가 번영을 과시한 또 하나의 방법은 이방인들에게 제공된 품위 있는 한때의 관습이었다. 이 모자이크에도 그 증거가 있는데 그리스어로 건강하시오 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는데 일종의 환영사인 셈이다. 제국의 모든 시민은 동등했고 누구나 자신들의 생각이나 물건을 자유롭게 교환할 수 있었다. 섬의 통치자나 항상 이곳에 거주하는 자들까지 모든 방문객들에게 로마식 환대를 베풀었던 것으로 보인다. 와인과 고기, 그리고 시실리에서 재배한 온갖 농산물이 제공되었는데 시실리는 곧 이탈리아의 땅이자 지상의 낙원 곡물의 위대한 어머니 만인의 어머니라 부른 곳이었다. 때로 군대의 임무는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지키는 것이었다. 그리스섬 산토리니(Santorini)에는 초기정착마을인 피라(Fira)가 있다. 피라는 늘 지진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섬의 반 이상이 기원전 2000년 바다 속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피라의 고고학적 유물들은 도시가 여러 번 재건되었음을 보여주는데 한번이상은 지진으로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지진은 공공건물과 가옥들을 심각하게 훼손했을 것이다. 따라서 로마군대에겐 때로 도시재건프로젝트가 맡겨지기도 했을 것이다. 우물을 파거나 도로를 닦고 공중위생을 복구하는 작업 말이다. 군 장교는 스스로 이런 공적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두각을 나타내기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제국의 외곽으로 벗어나는 동쪽으로 이동하면 요르단으로 들어선다. 로마의 마지막세기를 연구한 고고학자들은 아름다운도시 제루사(Gerasa)를 발견했다. 그러면서 돌고래의 형상이 새겨진 수많은 배수구 뚜껑들을 발견하곤 또다시 미궁에 빠져버렸다. 돌고래는 분명 바다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제루사는 사막으로 둘러싸여있고 바다에서는 먼 곳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을까? 발굴 작업과 함께 수십 년간 융성했던 도시의 모습이 드러나면서 제루사란 도시가 물과 어떤 관련이 있었는지에 대한 단서도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 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유적은 님파에움(Nymphaeum)인데 인상적인 장식이 아름다운 분수대이다. 돌로 포장된 이 수로들은 물을 흘려보내던 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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