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세계와 유대 기독교 세계의 충돌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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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이슬람은 비잔틴제국 해군의 거점이 되었던 이집트를 639년과 640년에 알렉산드리아 침공으로 획득하였고, 시리아까지 이슬람제국 영역에 포함시키게 되었다. 이슬람은 비잔틴제국의 해양장악에 거점이 되었던 이집트를 639년과 640년에 알렉산드리아 침공으로 획득하였고, 시리아까지 이슬람 제국 아래에 두기 시작했다. 이것은 지중해세계에서의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으며, 비잔틴제국의 입지를 크게 약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지중해는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의 연결망을 형성하였고, 고대 제국들은 이 지중해를 바탕으로 찬란한 문명을 영위하며,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었다. 이러한 지중해의 중요성을 인지한 이슬람은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기독교 세계에 대한 침입을 강행하게 된다. 무슬림의 시리아 이슬람 정복은 단기간에 용이하게 진행되어져 갔다. 비잔틴제국은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격렬한 사투로 침체기에 접어들었으며 강한 해군력을 보유 했지만, 이슬람과의 육전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또한 비잔티움은 단성론 기독교도들을 박해하고 그들을 경제적으로 핍박한 것에 반하여, 이슬람세력은 종교적 관용을 포함하였기에 열렬히 환영받았다. 이슬람 제국은 결국 시리아와 이집트를 포함해 북아프리카와 이베리아 반도 까지 장악하게 되면서, 당시 세계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지중해를 장악하게 된다. 이로 인해 지중해 세계에서 아랍인들의 활동이 증가되었으며 지중해 세계의 정치적·문화적 현상을 영속적·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이 당시 유럽세계는 남쪽으로는 지중해의 제해권을 빼앗기고 이슬람 세력의 침입을 받고 북쪽으로는 바이킹이라고 불리는 노르만족의 침입을 받았다. 그리하여 유럽세력은 대륙에 완전히 갇혀버린 상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와 로마가 발휘한 문화 창조력도 거의 상실해 버리게 된다.
2. 유럽 기독교세계의 대반격
유럽은 10세기말, 봉건제도를 기본 축으로 삼아 정치적 안정을 찾으며, 사회적, 경제적으로 상당히 활기를 가지게 되었고, 기독교의 교세가 확대되면서 교황청의 영향력이 성장하며 교황권이 신장되었다. 유럽의 기독교도들은 이슬람교도들을 응징해 기독교의 성지를 탈환하고, 지중해 패권을 다시 잡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우르반2세는 십자군 운동을 통해 교황권을 더욱 강화 하고자 했으며, 그리스정교회를 로마 가톨릭교회에 통합하고자 하였다. 당시 셀주크 투르크족은 유럽 기독교들의 성지순례, 동방무역을 방해하고 예루살렘의 기독교들을 박해하고 있었는데, 이것을 구실삼아 8차에 걸친 십자군원정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 전쟁은 실패로 볼 수 있다. 전쟁은 성지탈환이라는 당초의 목적 달성에 실패하였고, 상업적 전쟁으로 변질되었다. 또한 십자군원정 당시 십자군들이 저지른 갖가지 만행들이 이 전쟁의 실패로 보는 이유 중 하나이다. 유럽세계의 관점에서는 지중해를 되찾으며 유럽세계의 숨통을 트였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볼수 있지만, 이 전쟁으로 이슬람세계와의 적대의식이 더욱 커졌으며, 이때 생겨난 적개심으로 인한 이슬람세계와 기독교세계의 갈등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3. 이슬람세계의 재공격
십자군 전쟁이후 이슬람세계의 주도권은 셀주크 투르크족에서 오스만 투르크제국으로 넘어가게 된다. 이후 오스만 투르크는 마케도니아. 세르비아등 발칸반도의 국가들을 공략하기 시작하였고 헝가리를 중심으로 한 유럽 십자군도 패퇴시켰다. 비잔틴제국의 수도 비잔티움 을 제외한 주위의 지역들을 모두 점령하며 결국 1453년 비잔틴제국을 정복하게 된다. 오스만투르크의 술탄 메호메트 2세는 비잔틴제국을 정복한 후, 기독교의 잔재를 없애고 성소피아 성당을 이슬람식으로 바꿨으며, 비잔티움을 이스탄불로 개칭하여 제국의 수도로 삼았다. 이후, 오스만 투르크족은 발칸반도 대부분을 장악하게 된다. 1529년 9월에는 오스트리아 빈을 포위하였지만, 2주 만에 포위망을 풀었다. 또한 이들은 유럽연합 함대를 격파하며 지중해세력을 지배하게 되었다.
4. 가톨릭교 신성동맹과 오스만 투르크제국 응징
유럽세계는 루터와 칼뱅의 종교개혁으로 인한 혼란과 신교와 구교로 나누어져 30년 전쟁에 빠지게 되고, 끊임없는 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이런 혼란한 분위기에 오스만투르크는 발칸반도와 지중해 연안에서의 영향력을 키워 나갔다. 이러한 유럽기독교 세계의 갈등과 분열 속에서 교황청과, 베네치아, 스페인은 신성동맹을 결성한다. 이는 신교의 세력이 커져가는 상황에서 구교의 입지를 강화하고 오스만 투르크를 응징하기 위한 의도였다. 신성동맹 해군은 레판토 해 부근에서 오스만 투르크제국의 함대와 전투를 벌여 오스만 투르크제국의 함대를 큰 피해 없이 대파하며 큰 승리를 거두게 된다. 이 해전으로 인해 유럽기독교인들은 투르크족을 응징했다는 심리적 만족감과 함께 기독교세계의 대의를 드높였다는 자부심을 가져오게 하였다. 반면 오스만투르크는 레판토 해전에서의 패배로 적지 않은 타격을 받았다. 레판토 해전이후 내부의 대립이 격화 되면서 이전에 보여주었던 왕성한 팽창력은 더 이상 발휘되지 못했다. 19세기 들어와 눈에 띄게 약화된 오스만투르크는 동맹국으로 1차 대전에 참전했지만. 대전에 패한 뒤 해체되어 북아프리카와 중동지역 영토를 대부분 상실한 제국은, 공화제를 도입하는 등 변모하여 현재의 터키가 되었다.
5. 이슬람세계와 기독교세계의 발칸반도에서의 재(再)격돌
그리스는 오스만투르크의 지배에도 불구하고, 상업과 금융업을 발전시키며 정체성을 보존해 나갔다. 19세기 들어오면서 그리스에서는 지식층과 상공시민들을 중심으로 민족주의적 자유주의적 사조가 크게 일어났다. 그 무렵 모든 계층의 그리스인들은 이교도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시기 그들을 자극 시킨 것은 빈회의였는데, 이 회의로 그리스인들을 무장투쟁에 나서게 되었다. 이후 그리스의 독립운동은 더욱 활발해졌지만 지방 세력가들과 지주 귀족에 의존한 이들은 군사훈련을 위한 장비와 훈련방법이 크게 떨어졌으며 결속력 역시 약했다. 하지만 그리스와 오스만투르크 간의 대결은 계속 되었고, 키오스 섬 사건을 계기로 유럽제국 및 미국에서는 친그리스운동이 일어났다. 이후, 그리스인들은 각국의 도움을 받아 결국 오스만 투르크제국으로부터 독립했다. 하지만 그리스는 발칸반도 서남단의 일부만 차지했을 뿐, 예전의 영토와 비잔틴제국의 수도였던 비잔티움을 차지하지 못하였다. 그리스는 독립 이후 에도 오스만투르크와의 갈등은 계속 되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사브레 조약으로 인하여 그리스-터키간의 전쟁이 일어났고, 키프로스 사태가 일어나는 등 대립과 충돌을 반복하고 있다.
6. 시오니즘과 이슬람주의의 운명적 대결
유대인들이 기독교 2천년의 세월동안 전 세계에 흩어져 유랑하는 민족적 비극을 겪어왔다. 중세 유럽의 기독교도들은 유대인들을 심히 핍박하였는데 그들의 종교 관념으로 인해 그 핍박은 더욱 가중 되었다. 그들은 기독교 2천년의 세월 내내 흑사병등과 연관되어 각종 재앙의 원인으로 여겨졌으며 이러한 중세의 반유대인 정서는 독일의 반유대인 정책으로 이어지게 된다. 비스마르크는 독일 국민의 결속을 다져 통일을 이루고자 ‘반유대주의(Anti-Semitism)’을 폈으며, 이는 히틀러에 의해 자행된 할러코스터로 불리는 유대인 말살정책으로 이어졌다. 이렇게 핍박을 받던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뿌리였던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하고 있었는데 오스트리아 빈의 유대계 언론인 헤르츨의 ‘유대국가’와 ‘오래된 새로운 땅’은 시오니즘의 촉매제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그들이 나라를 세우려고 한 팔레스타인은 2천년이상 아랍인들의 주거지였다. 그리하여 여러 대체 방안이 논의되었다. 러시아에서는 ‘호베베 시온’을 결성하여 팔레스타인으로의 이주를 장려하였고, 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헤르츨이 주도한 시온주의자대회를 계기로 그들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할 것을 결의했다. 그리고 1917년 영국은 ‘발포어 선언’ 이후 팔레스타인에서의 유대인 국가건설을 약속하였고, 이에 자극받은 유대인들은 꾸준히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유대인의 수는 이 지역을 기반으로 급격한 증가세를 보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고 각 민족의 분쟁 틈에서 1948년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가 건설되었다. 이에 유대국가인 이스라엘이 아랍국가인 팔레스타인에 형성되게 되자 아랍인들은 강력히 저항하기 시작하고 이슬람 문명에 대하여 반성하고 그들 자신의 정통성을 보존하며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이슬람 부흥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는 중동전쟁의 원인이 되었는데 4차례에 걸친 전쟁과 갈등 속에서 ‘중동의 화약고’라 불리며 지금까지도 많은 인명피해와 혼란이 지속되고 있다.
<제 2부 이슬람교와 이슬람제국, 그리고 아랍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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