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기독교세계와 이슬람세계 충돌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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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세계와 이슬람세계 충돌의 역사
우선 기독교세계와 이슬람세계 이 두 세계는 양립 불가능한 두 세계의 만남일까요? 기독교세계와 이슬람세계는 7세기 중엽에 아랍계 이슬람 제국의 지중해세계로의 쇄도로 인해 본격적으로 충돌한 이후 수차례에 걸쳐 충돌했다.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이슬람교 측의 선공 이후 기독교 측의 반격 이슬람교 측의 재공격과 기독교 측의 재반격으로 공격과 반격이 되풀이 되었다. 아랍 측의 공격이 있은 이후 유럽의 기독교세계는 십자군운동으로 응수 했고 이슬람 측은 다시 비잔틴제국과 발칸반도를 공격해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다시 가톨릭교 측의 교황청 , 베네치아 , 스페인의 신성동맹이 오스만투르크를 제압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 여호와와 알라가 유일한 신임을 확인하고 확인시키기 위한 힘겨루기였다는 것이다. 본격적 공격의 깃발을 먼저 든 쪽은 아랍 이슬람세계였고 그들의 공격은 크게 성공하였다. 610년경 메카에서 이슬람교를 창시했으나 토착세력의 질시와 박해를 견디지 못하여 메디나로 옮긴 무함마드가 메디나에서의 포교를 성공한 후 메카로 귀환한 것이 630년이었다. 그리고 아라비아반도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시리아 원정을 꾀하던 중 632년 8월 메디나에서 타계했다. 그러나 무함마드가 세운 이슬람제국은 그의 사후 100년 만에 아라비아 반도를 중심으로 동으로는 인더스강 서로는 북아프리카 이베리아 반도에 걸친 대제국으로 성장했다. 639년에 예루살렘을 손에 넣은 이슬람제국은 639년과 640년에 알렉산드리아를 공격하여 비잔틴제국의 중요한 해군기지가 있던 이집트를 병합하고 641년에는 바빌로니아성을 무너뜨리고 이라크를 점령했다. 그리고 페르시아에서 동진한 이슬람제국은 투르키스탄을 장악하고 724년에 인더스강과 중국의 서부지역까지 진출했다. 이 때 무슬림은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의 아르메니아도 그들의 땅으로 만들었다. 무함마드의 이슬람 제국이 짧은 기간에 영역을 성공적으로 확장해 간일은 놀라운 일이지만 특히 이슬람제국이 기독교세계와의 역사적 첫 만남을 거의 완승으로 장식한 일이다. 북아프리카와 이베리아반도를 차지하고 나아가 지중해해상권을 장악한 이슬람제국은 기독교도들을 유럽대륙으로 몰아가는데 성공했다. 시리아와 이집트를 손에 넣은 이슬람제국은 698년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를 장학했고 711년에는 아랍인과 카르타고의 강인한 원주민 베르베르족 혼성부대를 지휘한 타리크가 지브롤터해협을 건너 이베리아반도로 진출하였다. 714년경에 사라고사와 바르셀로나를 손에 넣은 그들은 드디어 피레네산맥에 이르렀다. 그리고 무슬림들은 우마이야왕조의 아프리카 총독인 압둘 라만의 지휘 하에 732년 피레네산맥을 넘어 유럽대륙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결국 시리아와 이집트 그리고 북아프리카와 이베리아반도가 무슬림의 땅이 됨으로써 지중해의 운명이 바뀌게 되었다. 4대 칼리파 알리와 자웅을 겨루던 무아위야가 알리의 세력을 꺾고 660년에 다마스쿠스에서 우마이야조를 창건하였다. 북아프리카를 장악한 아랍군을 손짓해 부르던 이베리아반도를 정복하는 일은 이슬람고로 개종한 베르베르족이 맡았다. 무사의 부장인 타리크는 711년에 주로 베르베르족 7천여 명의 군사들과 함께 지브롤터해협을 건너 오늘날에도 그의 이름으로 불리는 어느 산 지금은 타리크산이라 부른다. 아무튼 그 곳에 상륙했다. 이베리아반도의 서고트왕국은 왕위를 둘러싸고 벌어진 내분에 빠져있었다. 게다가 서고트족의 지배에 저항하고 있던 이베리아반도의 원주민 켈트족과 종교적 박해에 시달렸던 유대인이 타리크와 베르베르인들을 환영했다. 타리크는 서고트의 왕 로데리히의 군대를 패퇴시킨 후 북진을 계속해 그라나다 , 코드로바 , 툴레도 등을 점령하였다. 예상 밖의 성공에 고무된 북아프리카 총독 무사도 대군을 인솔하고 이베리아 반도를 건너와 세빌리아 , 메리나 , 시도니아 , 사라고사를 점령한 다음 칼리시아의 아스투리아스공국을 정복하고 이베리아반도 전체를 차지했다. 서고트왕국 출신인 일부 호족들은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공납을 거부하는 대신 넓은 영지를 보유할 수 있었다. 이슬람제국의 군대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피레네산맥을 넘어서 프랑크왕국으로 침공해 들어갔다. 720년에 유럽대륙과 이베리아반도를 갈라놓는 피레네산맥을 넘은 이슬람군은 먼저 나르본을 점령했다. 툴루스는 아키테느공외드의 저항으로 가론강을 따라 진격해 온 아랍군에 점령되는 것을 면했다. 하지만 이슬람제국의 이베리아 총독 압둘 알 라만은 아케테느 지역을 포기 할 수 없었다. 그는 다시 아케테느를 공격했다. 결국 보르도를 장악한 그의 군대는 바로 파리로 연결되는 투르로 쇄도했다. 이슬람군은 725년에는 부르군드까지 진출해 그 지역 사람들을 약탈했다. 보르도시를 위시하여 아케테느지역을 약탈한 다음 푸와티에를 거쳐 투르에서 메로빙거조 프랑크왕국의 실권자인 카롤루스 마르텔이 이끈 프랑크군과 역사적 전투를 벌였다. 북아프리카의 무어족도 그 때 이슬람군에 합류했다. 외드의 지원요청을 받고 군사를 일으켜 달려온 마르텔은 투르에서 7일간에 걸쳐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역사적 결전을 치렀다. 그는 서양 역사상 처음으로 보병과 중무장 기병을 출전시켜 프랑크왕국의 역사는 물론 유럽 역사를 다른 반향으로 이끌 뻔했던 전쟁을 승리로 장식했다. 물론 프랑크 측도 숱한 전사자를 내었으나 아랍 측은 사령관 압둘 라만을 포함하여 많은 전사자를 남기고 피레네산맥 남쪽으로 후퇴하였다. 그러나 투르전의 무대가 어디였는지는 아직도 확인되지 않았다. 투르에서의 승리로 프랑크왕국은 아랍 세력을 피레네산맥 너머로 쫓아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남프랑스는 여전히 아랍인들의 수중에 있었다. 유럽 기독교세계가 이슬람세계를 응징하고 지중해를 되찾기 위해서는 300~400여년을 기다려야 했다. 중세 서양사회는 10세기말에서 11세기 초에 이르러 그 나름으로 안정 속에 상당한 성장을 이룩했다. 그리고 정치적 안정 및 농업생산력의 증대와 함께 인구도 상당히 증가했다. 특히 서유럽은 11세기 중엽 을 지나면서 정치적으로는 물론 사회적 , 경제적으로도 상당한 활기를 자랑하게 되었고 활기를 되찾은 유럽의 기독교도들은 이슬람교도들을 응징해 기독교의 성지를 탈환하고 지중해도 되찾을 수 있는 힘을 가진 것으로 자부했다. 교황권의 신장과 더불어 기독교의 교세가 확대되면서 교황청의 영향력도 성장해 갔다. 사실 기독교과 교황청을 제외한 중세 서양을 생각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레고리우스 7세를 거치면서 교황청의 권위는 더욱 높아졌다. 그레고리우스 1세를 흠모한 그레고리우스 7세는 성직자 독신제를 확립하고 성직매매를 금지시켜 성직자 사회를 크게 정화했다. 그는 특히 군주가 고위성직자를 임명하는 관행을 없애고 교회법에 따라 성당참사회가 고위성직자를 선출하게 하려 했고 그것은 독일 황제 하인리히 4세에게 카놋사성의 굴욕을 안겨준 서임권투쟁을 낳았다. 밀라노 주교 선출에 간섭하지 말라는 경고를 무시해 파문의 형벌을 받은 하인리히 4세는 독일 남부지역의 봉건 영주들이 황제권을 견제하기 위해 교황을 지지하자 견딜 수 없어 교황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 로마를 향해 남행했다. 이 때 마침 아우스부르크종교회의를 주재하기 위해 북행중이던 교황의 알프스의 카놋사성에서 만난 황제는 맨발로 눈 속에서 사흘 밤낮에 걸쳐 사면을 애걸하여 가까스로 파문에서 벗어났다. 수년 후 독일의 영주들을 회유해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 하인리히 4세는 클레멘트 3세를 대립교황으로 임명한 후 이탈리아 원정에 나섰고 그레고리우스 7세는 교황청을 탈출해 황제의 포로가 되는 것은 면했지만 몸을 의탁한 남부 이탈리아의 노르만족에게 굴욕을 당하다가 몇 달 뒤에 타계했다. 그레고리우스 7세의 서임권투쟁은 그처럼 절반의 성공밖에 거두지 못했지만 교황권 신장에 적지 않게 기여했다. 그리고 이후 교황권은 십자군운동을 거치면서 더욱 성장했고 인노켄티우스 3세에 이르러 드디어 교황이 유럽의 군주들의 군주 같은 지위를 자랑하게 되었다. 그는 독일의 세 황제를 황제자리에 앉히고 두 황제를 폐위시켰으며 프랑스의 필립 2세와 영국의 존 왕을 굴복시켰다. 교황 우르반 2세가 십자군운동을 발의한 데에는 그의 웅대한 야망도 한 몫을 했다. 그레고리우스 7세의 이상을 계승했다고 자부한 우르반 2세는 십자군운동을 통해 기독교세계에 대한 자신의 권위를 신장시키고 특히 자신의 과세권을 기독교 전체로 확대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교황은 로마교회와 결별한 비잔틴제국의 그리스정교회를 로마가톨릭교회에 통합하는 기회를 잡으려 했다. 말하자면 기독교세계의 통일이라는 원대한 꿈이 그의 십자군운동 발의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마침 우르반 2세에게 십자군을 일으킨 빌미를 준 것은 아랍인들이 쇠퇴한 후 이슬람세계의 주인이 된 셀주크 투르크족 이었다. 이후 총 8번의 십자군 원정을 나서게 되는데 이것이 십자군 전쟁이다. 십자군이 남긴 것은 그들의 만행이 불러일으킨 이슬람교도의 기독교 및 그 교도들에 대한 증오심이었다. 사실 십자군의 만행은 이미 1차 십자군전쟁부터 시작되었다. 1096년 여름과 가을에 팔레스타인을 향해 출전한 십자군은 예루살렘에 도달할 때까지 3여 년 동안 생사를 넘나드는 전투를 수 없이 치르면서 많은 피를 흘렸지만 예루살렘으로 진격하는 과정에서는 물론 예루살렘을 장악한 후에도 살상과 약탈을 자행했다. 물론 십자군과 무슬림의 만남이 반드시 살육과 약탈 일변도로만 시종한 것은 아니었다. 보편적 현상은 아니었지만 십자군 사이에서는 서방도 동방도 아닌 새로운 세계 곧 동서양을 혼합한 세계가 자라나고 있었다. 그러나 십자군운동은 총체적 실패를 기록한데다 십자군 전사들의 일탈행위 , 이슬람세계와 기독교세계 사이의 대립을 자극하는 등 많은 부작용을 남긴 전쟁이었다. 200여 년에 걸친 대원정은 유럽 기독교세계로 하여금 일시 지중해를 되찾게 했지만 기독교세계와 이슬람세계의 대립을 심화시키고 증오심을 증대시켰다. 특히 이슬람교도의 기독교에 대한 적개심은 최고조에 달했고 이후 두 종교는 화해는커녕 서로 상대의 존재마저 인정하지 않으려는 상황으로 발전했다. 흑자는 오늘날의 이슬람세계의 기독교세계에 대한 적대의식이 십자군에서 비롯된 것으로 진단하기도 한다. 십자군은 무슬림들에게 그만큼 깊은 상처를 남겼던 것이다. 십자군은 관용 면에서나 지적 관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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